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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억양은 고향을, 음식은 습관을, 술은 취향을 드러낸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 독일 나딘마을의 지하 선술집 장면에서 배우들은 각자 맡은 캐릭터에 따라 어울리는 술을 마신다.

먼저, 그날 아들이 태어난 빌헬름 하사와 그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독일군 5명. 이들이 마시는 술은 독일 소주 ‘슈납스’다. 도수는 20~40도. 한 번에 원샷 하거나, 한국 소주처럼 맥주에 타 폭탄주로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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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독일인이지만 혼자 구석에 앉아 있던 게슈타포 소속인 디터 헬슈트롬 소령은 맥주를 마신다. 술 한잔하고 싶지만, 정신이 흐려지는 건 원치 않은 듯하다.

독일 장교 복을 입었지만 사실 연합군 소속인 바스터즈 요원들의 선택은 저가 위스키다. 이들 중 영국 장교인 아치 히콕스 중위가 있다는 걸 암시하는 듯하다. 헬슈트롬도 이들에게 33년 된 위스키를 한잔씩 선물하곤 말한다. “이 술처럼 너도 독일 출신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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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들 중 유일한 홍일점, 독일 최고 여배우이자 영국 스파이인 브리짓 폰 하머스 마르크가 마시는 술은 프랑스 샴페인인 ‘페리에 주에 : 벨 에포크’다.

1811년 피에르 니콜라스 페리에와 로제 아델에이드 주에가 만든 이 와인은 지난 200년간 유럽 왕실에 진상해온 최고급 샴페인이다. 빅토리아 여왕, 나폴레옹 3세, 벨기에 레오폴 1세, 해럴드 맥밀런 영국 총리 등이 즐겨 마셨다.

코르크 가게집 아들, 칼바도스집 딸인 이들은 자신들이 만난 해에 핼리 혜성이 떨어졌던 걸 추억하며 이 와인을 ‘행운의 샴페인’이라고 불렀다. 현재 대한항공 퍼스트클래스에서 제공되며 ‘사랑을 부르는 와인’이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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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꽃 내음, 시트러스 계열 맛으로 상큼하고 무난한 샴페인이지만, 사실 맛보다는 병이 더 유명하다. 라벨에 그려진 아네모네 꽃은 세계적인 유리공예가 ‘에밀 갈레’가 디자인한 것이다. 아네모네 꽃말은 ‘속절없는 사랑’과 ‘배신’이다. 스파이에 어울리는 꽃말이다.

현재 가격은 20~30만원대. 당시 유럽 내 가격도 그리 싸진 않았을 것이다. 소주와 싸구려 위스키, 맥주를 마시는 군인들 사이에서 혼자 고급 샴페인을 마신다니. 검소하고 털털한 성격은 아니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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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샴페인은 극 중 또 다른 여주인공인 쇼사나 드레퓌스도 마신다. 그녀에게 반한 프레드리크 촐러 일병이 그녀를 괴벨스와 만나는 자리에 초대하고, 이 자리에 우연히 합류한 헬슈트롬이 그녀에게 이 샴페인을 따라준다. 두 사람의 사랑이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이 장면이 기억이 잘 안 난다면, 바로 다음 장면은 기억할 것이다. 쇼샤나가 가족의 원수인 유대인 사냥꾼 한스 란다 대령과 재회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란다 대령은 슈트루델을 두 개 시키고, 크림을 주문한 후, 자신은 에스프레소를, 쇼사나를 위해선 우유를 대신 주문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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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에 대해 일부에서는 고기와 유제품을 함께 먹지 않는 유대인 율법을 지키는지 확인하려 했다는 해석이 나돌지만, 이는 과장된 것이다. 이 장면에 대해 타란티노가 공개한 시나리오에는 쇼사나의 가족이 낙농업자였고, 목축농가에서 란다가 쇼샤나 가족을 몰살했기 때문에 우유를 주문해 그녀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주려 했다는 해석이 적혀 있다.

실제로 영화에 나오는 슈트루델은 독일에서 즐겨 먹는 디저트 ‘아펠(사과) 슈트루델’ 혹은 ‘밀히람(우유크림) 슈트루델’로 보인다. 물론 고기로 만든 슈트루델도 있지만, 이는 위에 슈가 파우더가 뿌려 나오지 않는다. 보통 이것을 생크림이나 바닐라 소스, 커스터드를 끼얹어 먹는다. 한스 대령처럼 에스프레소와 함께 먹어도 맛있고, 소샨나가 받은 우유, 샴페인과 먹어도 맛있다.

영화 속 최고의 악당 란다 대령은 이 장면에서처럼 우유에 집착한다. 영화 첫 장면 라파디트 농가를 방문해 쇼사나의 가족을 몰살하는 장면에서도 란다 대령은 와인을 권하는 라파디트의 제안에 대신 우유 한 컵을 달라고 한다. 유대인이 숨어 있는 걸 눈치 챈 후에도 “떠나기 전 우유 한 잔 마셔도 되겠오?”라고 묻는다.

란다 대령은 극장 행사에서 샴페인을 들기도 하고, 미 육군 보병 장교인 알도 레인 중위와 협상할 때 레드 와인을 따르긴 하지만 딱히 마시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술보다는 우유를 좋아하는 듯하다. 이렇게 중년의 군인이 술보다 우유에 집착한다면, 이상할 것 같긴 하다. 소샤나가 ‘란다 = 우유’로 인식하는 계기, 혹은 타란티노 감독이 란다 대령의 엽기적인 성격을 보여주려는 장치로도 보인다.

☞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는 와인바 ‘릿지 828’ 김수호 대표는 “이름에서 1890년대의 파리를 연상케 하는 ‘페리에 주에 : 벨 에포크’는 캐비어와 같이 먹는게 가장 맛있다”고 했다. 캐비어의 크리미하고 진득한 깊은 맛이 상큼하고 향기롭지만 조금은 무난한 이 샴페인과 잘 어울린다는 것. 김 대표는 “질 좋은 캐비어를 비스킷 위에 올려 먹거나, 아니면 그냥 퍼먹어도 좋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