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52주년을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 하는 한국문학의 축제.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올린 뒤 연말에 그 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김인환·오정희·정과리·구효서·이승우·김인숙)는 최근 비대면 독회를 열고 지난해 하반기에 출간된 소설 중 10~12월에 나온 작품 20여 편을 검토했습니다. 2월 독회의 추천작은 모두 3권. ‘노라와 모라’(김선재),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우다영), ‘모든 것은 영원했다’(정지돈)입니다.

2021년 동인문학상 2월 독회 심사평 전문

김선재 장편소설 '노라와 모라'
'노라와 모라' 김선재 소설가 /남강호 기자
끝없는 이야기를 하는 소설들이 한 권의 책 안에 들어 있다. 한없이 길게 이어지는 이야기라는 뜻이 아니라 어디로든 펼쳐질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이야기라는 뜻으로. 우다영의 이야기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꼬리 옆에 다른 꼬리가 붙는 방식으로 펼쳐진다.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 소설가 우다영
이 소설은 시대의 격랑에 실린 한 인물의 이야기다.
'모든 것은 영원했다' 소설가 정지돈


◇김인환·문학평론가

◊ 김선재 ‘노라와 모라’

김선재의 『노라와 모라』는 인연의 신비를 서정적인 문체로 아름답게 묘사한 소설이다. 중국집 주방장 아버지가 노라를 낳고 자기 가게를 열려고 준비하다 개업을 며칠 앞두고 갑자기 죽었다. 모라는 여섯 살 때 어머니가 가출하여 작은할아버지 집에 맡겨졌으나 3년만에 노인이 치매에 걸려서 혼자 살았다. 인쇄공 아버지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찾아왔다. 노라의 엄마와 모라의 아버지가 재혼하여 7년을 살다가 인쇄소가 망해서 헤어졌다. 아버지는 돈 떼어먹은 사람들을 찾는다고 돌아다니며 모라를 돌보지 않았다. 모라는 16년 동안 시간제 아르바이트로 생활했다. 아버지가 오지 않아도 월세는 어김없이 내야했다. 노라는 대학은 가지 못했으나 직장을 얻어서 극성인 엄마와 아주 궁핍하지는 않게 자랐고 지금은 명농사라는 종자 가게에서 일했다. 모라의 아버지가 객사했다는 연락을 받은 모라는 20년만에 노라에게 전화를 했다. 노라와 모라는 화장장에 가지만 유골 인수를 포기하고 돌아서 나와 버스 정거장에서 헤어졌다.

인쇄공 양판수의 죽음은 모든 사람이 부도와 실직의 위협을 받는 우리 시대의 모순을 압축하는 상징이다. 무력하고 고독한 개인이 차가운 익명의 시장에서 추상적 노동시간으로 환원되었고 불완전 경쟁 시장은 유통과 분배를 왜곡하면서 자유의 환상만 증폭시켰다. 모라는 미래에 대비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노력하면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김선재는 이런 시대에도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놀랍게 억제된 문체로 보여준다. 노라의 엄마는 노라에게만 용돈을 주고 노라는 모라의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는 어색한 가족이었지만 어느 비오는 밤 모라는 잠자는 노라의 곁에 누워서 혼자가 아니라는 따뜻한 실감을 느꼈다. 그 실감이 20년만에 노라에게 전화를 하게 했다. 혼자 있는 게 끔찍할 때 노라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모라에게 편지를 썼다. 두 사람은 각각 때때로 방에 들어가 누가 다녀갔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20년 동안 그들은 함께 살고 있었던 것이다. 버스 정류장에서 노라는 모라의 메일주소를 손바닥에 적어달라고 하고 돌아가서 모라의 글씨가 적힌 자기 손바닥 사진을 모라에게 보냈다.

노라와 모라가 서로 생각하는 마음은 물처럼 맑고 또 물처럼 깊다. 모라는 노라를 다시 만나고 “다시 살아나는 마음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 문장은 우리에게 우리가 오랫동안 망각하고 있었던 내면의 리듬을 회복하게 하고 피가 통하는 따뜻한 손길과 감각의 뉘앙스를 드러내는 부드러운 눈길을 생각하게 한다.

◊ 우다영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

우다영의 소설들은 최인훈 소설의 계보를 잇는 관념소설들이다. 전기공학과를 나와 수력발전소에서 일하는 남자 화자는 모든 사람과 친하면서도 어딘가 늘 거리가 느껴지는 은령을 좋아한다. 소설에서 화자와 은령의 관계는 지성과 감성의 대립으로 전개된다. 선은 진화의 역정에서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수단이며 인간은 매순간 떼어낼 수 없이 얽혀 있는 선과 악 가운데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고 선택의 주체는 인간의 지성이라는 것이 은령의 믿음이다.

화자는 자연스러운 감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은령을 비판한다. 그러나 감성의 인간인 화자는 회사 돈을 황령하기도 하고 아내와 별거하기도 하며 살아온 데 반하여 은령은 혼자서 갈 데 없는 아이들을 입양하여 키우고 많은 자식과 손자들에 둘러싸여 죽는다. 화자는 은령의 편지를 통해서 그에 대한 그녀의 사랑을 알게 된다. 거인의 눈에서 신이 나와서 거인은 실명하였고 눈먼 거인에게 신은 실재이면서 꿈이라는 배경설화는 인지착오가 인간의 운명이라는 소설의 주제를 나타낸다.

인간은 모두 쌍둥이이면서 동시에 단독자이다. 세 자매, 아라-아성-아해의 이야기는 인간의 보편적 개별성을 쌍생적 고유성으로 변환해 본 실험이다. 물놀이 하다 바다에 빠져 죽는 아라가 있고 아성과 나란히 뒷좌석에 앉았다 교통사고로 죽는 아라가 있는가 하면 아성이 죽은 후에 물리학자가 된 아라가 있다. 물리학자 아라는 비엔나에서 환경운동가가 된 초등학교 동창생 기원을 만난다. 두 사람의 대화는 양자론과 환경문제에서 시작하여 익숙함과 낯설음이 뒤얽혀 생성하는 세계의 근원적 어긋남에 이른다. 아라가 죽고 이모에게 맡겨진 아성은 대학을 자퇴하고 이성애와 동성애를 겪고 아이 딸린 남자와 결혼하여 5년을 살고 서른 살 이후에도 6년 동안 세상을 떠돈다. 그녀는 항상 누군가의 집에 머물다가 빠져나온다. 아성의 이야기는 동생 아해의 시선으로 서술되다가 아성이 죽는 마지막 이야기에 와서는 독거노인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남자의 시선으로 바뀐다. 그는 아성의 일생을 타인의 탐험이라고 요약하고 남은 것은 그녀의 이야기뿐이며 그 이야기만은 그녀를 사랑하는 그의 몫이라고 말한다.

우다영 소설의 공간은 처음 도착해서 길을 찾아 헤메는 여행지처럼 묘사된다. 세상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이 돌아가고 그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어떤 사람들은 분노를 못 참고 보복하는 것을 자신의 운명이라고 믿는다. 우다영의 소설들에 반복해서 나오는 <사람은 사람을 도와야죠>라는 노래는 혼자 내버려 두면 사람이 망가진다는 의미의 가사를 가지고 있다. 수영 코치였던 의부에게 거북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의부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한다. 그는 두 남매의 아버지이고 시나리오 작가이고 점잖은 시민이다. 그는 의부의 관심을 독차지하려고 다른 선수들이 집에 오는 것을 막은 적이 있었다. 의부가 죽은 아내에 대한 집착 때문에 후취인 그의 어머니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그는 집을 나왔다. 그의 어머니도 죽고 의부는 간병인이었던 여자와 살고 있다. 그가 지은 영화대본은 불구가 된 왕년의 수영선수가 물에 빠진 소년을 구하는 이야기인데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소년과 감독의 이야기가 따로 끼어들어 소설은 네 겹의 얼개를 갖게 된다. 감독은 어린 덧니를 뽑아주려고 치과에 데리고 갔다가 의료사고로 어린 딸을 잃는다. 아버지의 부도로 소년의 출연료는 가족의 생활비가 된다. 영화는 성공하지만 소년은 약과 여자에 빠지고 감독의 아내는 자살한다.

작가는 인간을 움직이는 작은 어긋남들이 좋은 일을 일으킬지 나쁜 일을 일으킬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하려는 듯하다. 우다영 소설의 문제는 관념들을 적절하게 배치하는 대위법이 없다는 데 있다. 우다영은 최인훈의 소설이 복잡한 관념을 다루면서도 혼란스럽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고심해 보아야 할 것이다.

◊ 정지돈 ‘모든 것은 영원했다'

정지돈은 이차대전 이후 60년대 초까지의 사회주의 국제당 시절 말기로 돌아가서 이 세계 어디에도 발붙이지 못하고 방황하는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을 묘사한다. 미국에 거주하는 이민 1세대의 자녀들 가운데는 보편적 평등 공리에 매료되어 혁명과 독립을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공통된 목적으로 설정하고 공산당의 사회혁신활동에 참여하고 미군의 반파시즘 전쟁을 지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미국에서는 좌파를 비국민으로 규정하고 색출하여 제거하는 비미조사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김일성이나 박헌영과의 간접적인 관계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드러나는 사람들은 미국에서 직장을 얻을 수 없었고 심한 경우에는 추방되었다. 그들은 일단 사회주의 국가인 체코로 가서 머물면서 북한이나 독일이나 프랑스로 들어가려고 시도하였다. 아주 드물지만 미국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고 남한으로 간 사람도 있었다. 소설의 중심선은 1948년에 체코에 도착하여 프라하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로 일하면서 13년 동안 살다가 1962년에 시립병원 중앙연구소 소장이 되어 헤프로 이주하고 그 1년 후에 자살한 정 웰링턴이라는 한국계 미국시민의 생애를 따라간다. 성실한 공산주의자였던 그의 어머니 현 앨리스는 북한으로 들어갔다가 박헌영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는 아들을 데리고 사는 연구소 동료 안나와 만나 결혼하여 딸을 낳았다. 그는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였다. 그는 한국인 입국자들의 동향을 보고하는 임무를 받았고 북한으로 건너가기 위해 들른 한국계 미국인들에게 어머니가 북에서 처형되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체코는 전반적인 권위주의와 부분적인 방임주의가 무질서하게 얼크러져 있는 사회였다. 그는 체코에서 권위주의의 전면화가 일상에서의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비자유의 자유를 보았다. 사회주의 국가에 살면서 그는 공산주의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다. 삶의 목적과 동력을 상실한 그에게 가족과의 연대도 타성으로 굳어져갔다. 안나의 간절한 호소도 그의 경화된 삶을 변화시킬 수 없었다.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힘을 사회적 힘으로 인식하고 조직함으로써 사회적 힘이 더 이상 정치적 힘의 형태 안에서 그 자체로 분리되지 않을 때 비로소 인간해방이 완성된다”(118쪽)는 그의 신념은 공허한 추상이 되어 스러졌다. 이 중심선의 위 아래에 정지돈은 수많은 실제 인물들의 이야기를 중첩하고 첨가하여 거대한 환멸의 서사를 구성하였다. 소설의 후반부는 정 웰링턴을 탐색하는 정지돈의 편력담이다. 50년대 동구사회에 관한 수 많은 자료들을 검토하다가 정지돈은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비판하고 망명하여 카자흐스탄 조선극장 공식 작가로서 살아남은 한진의 이야기를 정 웰린턴의 이야기와 대비하여 제시한다. 끝내 무국적자로서 생을 마감한 한진은 러시아인 아내를 사랑했고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한진의 아내는 죽은 남편의 글을 소중하게 간직했다가 한국에서 출판할 수 있게 했다. 개인의 성실성이 전혀 통하지 않는 상황이 있다. 스탈린과 트루먼이 극한으로 대립하고 좌파 대중과 우파 대중이 타협 없이 충돌하고 김일성과 박헌영, 이승만과 김구라는 권력 중심들이 생사를 걸고 대중을 동원하던 해방정국은 본질적으로 전쟁 지향의 구조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개인의 결단은 이 구조에 아무런 변화를 줄 수 없었다. 좌파와 우파를 조정할 수 있는 완충장치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정지돈은 체코의 반체제주의자 바츨라프 벤다의 병행 정치 개념을 인용하여 당 없는 정치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병행 정치란 투쟁적인 방식으로 저항하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진리 안에 새로운 영토를 만들어 광범위한 네트워크로 비정치적 정치세력을 형성함으로써 좌파 정당과 우파 정당을 변화시키는 실험이다. 나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병행 정치의 실험이라는 정지돈의 의견에 동의한다.


◇오정희·소설가

◊ 김선재 ‘노라와 모라'

각기 부모의 재혼으로 가족이 되어 일정기간 함께 살다가 헤어진 후 20년만에 해후한 의붓자매 노라와 모라의 시점으로 나뉘어 서술하는 이 소설은 간결한 단문으로 그려보이는 결핍과 상실의 황량한 내면정경이 돋보인다.

삶의 연속성과 그 연속성에의 믿음이 사라진 자리에 불안과 소외가 찾아든다. 소설이 진행되어감에 따라 완강히 단절되어 있는 ‘여기와 거기’ ‘과거와 현재’ ‘노라와 모라’ 들이 점차 아주 흐린 선으로 이어지며 존재감이 분명해진다. 곤륜산에서만 자란다는 돌배나무를 이르는 ‘라’와 가지런한 그물이라는 뜻의 ‘모라’. 어쩌면 그것은 삶의 고귀함과 온전함과 아름다운 질서를 기원하는 간절한 기도이고 꿈일 것이다. 생을 피폐하게 만드는 결핍과 결손, 끊임없이 모욕하고 훼손해들어오는 것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생명체들이 서로 나누는 온기, 사랑이라고 그것만이 치유이고 회복이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 때로 몽환적이고 회화적인 문체로 두 불행한 어린소녀들이 잠깐 나누었던 따뜻함이 오랜 세월후 그들을 일으켜세우고 마음을 회복시키는 힘으로, 불씨로 작용하게 되기까지의 그 지난한 여정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 정지돈 ‘모든 것은 영원했다'

1900년대 초 하와이 이민 1세대를 부모로 하여 1925년 태어나고 1963년 체코의 작은 도시 ‘하프’에서 음독자살로 생을 마감한 정웰링턴이라는 실존인물의 일대기이다. ‘미국시민권자, 동양인, 조선의용대계열의 좌익파르티잔’을 태생적 조건으로 한 정웰링턴과 주변 사람들의 생애와 행로를 작가의 개입을 최대한 자제하며 기술하고 있는 이 소설은 망국과 광복과 전쟁과 그 이후의 세월을 나라밖에서 겪어가는 그들이 사로잡혔던 매혹과 희망, 좌절과 환멸, 변질과 변모의 여정이기도 하다.

공산주의자로 태어나고 자란 정웰링턴을 비롯한 주변인물들은 공산주의적 이상사회, 지상낙원을 꿈꾸며 미국에서 유럽으로 북한으로 체코로 옮겨갔으나 그 어느곳에도 편입되지 못하고 떠돈다. 남한과 북한과 미국 체코에서 입국을 거부당하거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처형당하고 숙청당하는 방식으로 제거된다. 이용당하고 버림받으며 역사의 희생물로써 근현대사의 이면, 숨은 그늘이 된다. 그들은 어떻게 공산주의 이념에 들리고 회의하고 도저한 허무주의자가 되어갔을까. 작가는 산재해 있는 빈약한 기록과 풍문을 통해 그 시간들을 소환하여 자신이 ‘보지 못한 것들’을 증언하며 그들의 존재와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의미를 묻는다. 지나간 연대와 그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어둠과 슬픔과 그리움을 소설로 복원하고 반세기를 격한 그 시대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겹쳐놓으며 우리는 역사속의 한 존재로서 그 도도한 흐름 속의 한갓 부유물인가. 부침을 되풀이하며 흘러가는 존재인가 라는 오래된 질문을 새롭게 던진다.

◊ 문지혁 ‘초급 한국어'

영어로 글을 쓰는 이민작가를 꿈꾸는 외국인 체류자로서의 생활에 한국어 수업이라는 제재를 병렬하여 끌어가는 방식과 사유의 흐름이 자연스러워 재미있게 잘 읽힌다.

모국어란 무엇일까. 외국인학생들에게 초급한국어을 가르치면서 습관적으로 당연히 쓰고 있는 너무나도 익숙하고 친숙한 모국어를 비로소 ‘타자화’해보는 경험은 새롭기도 하다. 문화의 차이, 개인간의 다름에서 오는 갖가지 문제들에 대응하는 유머에 일단 풋 웃음을 터뜨리다가 슬며시 웃음이 지워지면서 슬프거나 가슴이 아파진다. 그 아픔을 따뜻함이 어루만진다.

흔히 말하는 묵직한 소설은 아니다. 그렇다면 가벼운가? 터치는 가볍되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다. 이 작가의 균형잡힌 따뜻한 시선, 무리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은 중요한 덕목으로 보여진다.

상쾌한 소설이라는 느낌은 작위성이나 무리한 설정이 없고 문제를 감춰 말할 수 있는 세련성을 갖춘데서 오는 것일 게다. 예컨대, 문학이란 ‘지금은 몇시예요? 라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그건 어떤 시간이었나요? 라는 카이로스의 질문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서 오는.


◇정과리·문학평론가

◊ 전반적 인상

최근 10년 사이에 모종의 작가군(群)이 형성되었다는 인상을 말해보고자 한다. 대개는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물리적 경계를 넘어서 세상의 모든 일에 강렬한 호기심을 발동하면서, 그들의 눈길이 머무는 지식들을 유용한 정보로 채취하는 능력과 세상의 움직임들의 다양성에서 국가의 경계를 넘어 전지구적인 상상의 영역을 열어 보이는 솜씨를 엿보게 한다. 이 정도의 촉수와 채집 용량을 가지고 있다면 새로운 소설에 대한 기대로 인한 긴장감을 바짝 죄게 마련인데, 이상하게도 생산물은 ‘아직’ 만족스럽지가 않은 것 같다. 풍부히 채집된 정보들을 잡학의 나열로 써버리거나, 헐리우드 B급 영화들과 비슷하게 사회 이탈자들의 가학적/자학적 향락의 사태를 묘사하는 데에 쓰거나, 그것도 아니면 매체의 기법적 변형에 몰입하여 언어의 감옥에 갇히는 등, 자신들이 적재한 역량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의 뒤에 현실의 지배적인 기운에 짓눌린 심각한 무기력이 암울한 정신의 늪을 형성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된다. 표면적인 활달함과 이면의 우울 사이에 연락망이 끊긴 듯이 보인다는 것이다. 나는 이 잠재된 자원을 풍부히 확보하고 있는 이들이 자신의 재능을 ‘소모’하기보다, 세상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창조를 위한 고독한 노동의 에너지로 ‘연소’시키기를 바란다. 아마도 관건은 풀어진 연락망을 여하히 당기느냐에 있을 것이다. 어쨌든 제 풀에 지치려고 소설쓰기라는 힘든 노역을 견디는 건 아닐 테니까 말이다.

또 하나, 언제부턴가 지배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는 소설들에서 ‘아이러니’가 증발해버린 듯하다는 느낌이다.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겠다. 소설의 근본 성질은 ‘자유’이다. 따라서 어떤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모든 장르의 원리들을 제것처럼 활용한다. 그런 소설의 자유를 유일하게 규제하는 원칙이 ‘아이러니’라고 20세기의 이론가들은 주장해왔다. 아이러니는 스스로의 의지에 반하는 결과에 다다르는 것. 소설은 자유의 이름으로 모든 삶들을, 존재하지 않는 삶까지 포함해, 넘나들 모험의 권한을 얻는 대가로, 최종적으로 그런 모험의 실패와 좌절을 맛보게 된다. 그렇게 해서 소설은 현재까지는 인류에게만 할당된 ‘소설하는 존재’의 가능성을 무한으로까지 늘리는 과정 속에서 그것의 위험과 한계를 동시에 경험하게 한다. 만일 아이러니가 없다면 소설하는 존재는 초월적 존재로 증발해 버리거나 아니면 악마성의 권화로서 지상의 재앙이 될 것이다.

오늘의 소설들에서 아이러니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렇다면, 이는 고전적 이론의 무효성을 고지하는 것인가? 다시 말해 이제 소설에 대한 다른 설명틀이 나올 때가 된 것인가? 그렇다면 그 변화의 근거는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혹은 그러한 현상은, 앞에서 말한 악마성으로의 질주라기보다, 자유의 모험의 사전적 포기를 보여주는 현상으로 해석될 여지는 없는가? 다시 말해 자유의 관념적 표명으로 육체의 상실을 방지하고자 하는 면역적 조치이지는 않는다? 그 조치를 통해서 추구해야 할 목적으로서의 자유를 기정사실화된 소유물로 바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문제이다.

◊ 김선재, 『노라와 모라』(장편, 다산북스, 2020.11)

이 작품은 오늘날 소설의 일반적 추세와 유사한 듯하지만 전혀 다른 세계를 열어 보이고 있다. 그의 소설은 지극히 사적인 존재들의 사적인 풍경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점에서 ‘사적인 것들’을 전면에 내세운 오늘의 일반적 추세와 부응하는 듯하다. 그러나 아니다. 그의 사적인 세계는 공적인 것을 대체하거나 대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후자와 다르다. 김선재의 사적인 것들은 철저히 외롭게 존재한다. 자신의 얼굴울 다이얼 비누를 쥔 투박한 손으로 박박 문질러 씻겨주다가, 문득 숨을 멈춰 버린 아버지, 문득 한 가족이 되어 살게 된 두 특별한 이름의 또래들의 삶에 어떤 사회적 의미가 깃들 수 있는가? 그들의 삶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주어진 자신의 소원과도 무관한 “의지 너머의 인생”들이다. 이런 사적인 세계들이 공적 교감의 장인 소설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바로 여기에 김선재 소설의 특장이 놓여 있다. 그는 이 하찮고 사사로운 인물들의 삶에 약간의 생기를 부여함으로써, 지극히 사적인 것들, 다시 말해 사회적으로 드러날 수 없는 존재들이 실제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즉 비사회성의 사회적 존재성을 독자의 촉수로 감각케 한다. 그리고 그것을 넓혀 나간다. 공간적으로 그런 이름 없는 존재들이 마치 새벽 직전 밤하늘의 별들처럼 새까맣게 초롱거리고 있다는 것을 환기하며, 시간적으로 그들의 “거칠고 단조롭게 반복되는 그 일련의 움직임”들이 생명의 지속적 실존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런 양방향의 점진적인 전개를 통해 ‘노라’와 ‘모라’가 환기하는 사적인, 즉 이름없는 존재들은 독자의 정신 속에서 사회적으로 존재하게 되며, 그들 삶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한편, 군림하는 공적 세계에 대한 다양한 방식의 성찰을 유도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효과가 사적 세계로 공적 세계를 대체하는 추세와 어떻게 다른가? 노라와 모라의 삶은 결코 공적 세계로, 다시 말해 지배적 위치로 발돋음하지 않는다. 그들의 삶은 저마다의 개별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는 소통 자체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들이 소통의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사회적 존재성 자체가 실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소통을 가능케 하는 것은 그들을 둘러 싸고 있는 주위 환경이다. 그 환경에는 자연 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모든 것이 포함된다. 그 주위 환경이라는 매개자를 통해 고립무원의 세계들이 음향과 반향의 방식으로 서로를 타진하고 탐색하며 수용하고 반사한다. 그 움직임 속에는 공적 세계가 흔히 보이는 규정과 질서의 적용이 없다. 아니, 그런 규정과 질서를 해체하고 평등한 교류를 낳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공적 세계 안으로 파고든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로 그 형상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꿈인 것 같았다. 그 정적 사이로 다시 모라가 중얼거렸다. 작고 까끌까끌한 목소리였다.

새가 울어.

……그러네.

나도 다시 눈을 감으며 말했다. 눈꺼풀 사이로 스미는 희미한 빛 속에서 또 새가 울었다.’


이 대화는 한참 뒤,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변주된다.


‘새가 울면 기다렸다는 듯 새어들던 여명과 비가 오면 파닥거리며 빗방울을 튕겨내던 잎사귀들, 나무들. 우리는 축축한 바닥에 누워 그 소리를 듣곤 했다. 한밤 같은 한낮에, 혹은 한낮 같은 한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소리가 만든 시간과 공간 들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모라는 그런 곳은 모른다고 했다. […]

그렇다면 모라에게는 뭐가 있을까.

나에게는 없는 어떤 것.

없는 것을 생각하는 것.

그런 것.

곤륜산에서만 자란다는 배나무 같은 것.’


이런 풍경을 사회 생활의 모든 광경들에 배접시켜보라. 거기에 김선재의 소설이 우리에게 은밀히 전하는 권유가 있다. 표면의 삶에 집착하지 말라고, 그보다 더 풍요한 관계가 우리의 속 깊은 곳에서 복류하고 있다고. 그것은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의 근본적인 전환을 은근히 독촉한다.

◊ 우다영의 『엘리스 엘리스 하고 부르면』(소설집, 문학과지성사, 2020.12)

이 신인의 소설집은 두 가지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하나는 묘사의 기법적 이채로움이다. 그는 얼핏 보면 동떨어져 있는 사물들, 즉 의미 연관이 부족한 표지들을 끌어 모으면서, 그들을 상호반사시켜 하나의 의미적 양상을 길어내고 있다. 이는 오늘날 소설들에 미만해 있는 제유적 기법, 즉 특징적인 표지로 현실을 지시하는 방식과 유사한 것 같지만 아니다. 오히려 작가는 그런 제유적 기법에 반대한다는 것을 ‘페도라’가 ‘헬맷’을 대신하지 못하는 사건을 통해 은근히 표명하고 있다. 이 작가의 기법이 젱유적인 기법과 공유하는 것은 부분적 표지를 끌어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적 표지들은 대부분 특징적이라기보다 엉뚱하다는 성격이 더 크다. 그 엉뚱한 것들이 상호 반사와 융합을 통해 하나의 의미양상을 끌어낸다는 것은 제유적인 것이 아니라 환유적인 기법이다. 이는 한국소설에서 거의 볼 수 없었던 소설적 묘사 방식이다(물론 시에서는 작고한 오규원 선생의 환유적 시쓰기의 표명 이래 매우 풍부한 실례들을 축적하고 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이러한 작가의 기법이, 작가가 첫 소설에서 ‘은령’을 통해 제시했던 진화론의 새로운 관점, 즉 진화는 우연한 것들의 ‘브리콜라쥬’를 통한 변이라는 관점에 상응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작가가 현대 과학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아니라, 문학적 형식과 주제의 긴밀한 조응을 그가 의식적으로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이것은 우리가 신인에게서 기대하는 성실성의 일종일 것이다.

◊ 정지돈의 『모든 것은 영원했다』(장편, 문학과지성사, 2020.12)

이 소설은 초창기 공산주의자 ‘현 앨리스’의 비극적인 행적으로부터 출발해 그 아들'정 웰링턴'과 지인들의 말과 생각과 견문들을 따라가고 있다. ‘현 앨리스’에 대해서는 이미 역사학자 정병준 교수의 훌륭한 추적기,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 역사에 휩쓸려간 비극의 경계인』(돌베개, 2015)이 있었으니, 이 소설은 그 기록의 후일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사학자의 관심이 인물의 자취를 실증적으로 조사하여, 그 생애를 복원하는 데에 있다면, 소설가는 그 드러난 삶에 대해 다양한 성찰을 꾀한다. 그 성찰의 핵심은 이념이라는 환(幻)에 휘말려 드는 일의 허망함과 불가피성이라는 모순된 얽힘에 대한 괴로운 반추이다. 이 모순과 정면에서 맞닥뜨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그 장르에 합당한 구조적 두께를 확보하고 있다. 이 두께를 관통하면서 독자는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삶은 단순히 선악으로 재단될 수 없으며, 그 내력을 꼼꼼히 추체험하면서 그들의 삶의 뜻과 오류를 파악하고, 그들의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진전된 생각과 행동을 모색할 수 있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그것만이 지적 생명의 삶을 끊임없는 변화의 궤도 위에 올려 놓을 수 있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은 숱한 이데올로기 비판 소설의 얄팍함과 이념적 아집으로 스스로 부패해가는 모든 정치적 태도들의 일그러짐을 비추어보는 거울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물론 소설의 관심은 위에서 바라보는 눈길의 만족에 있지 않다. 그의 관심은 이런 환을 버릴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도 “무엇을 할 것인가 What is to be done?”라는 문제이다. 그 대답은 어렵다. 왜냐하면 이념의 실패는 외부적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적인 것인데, 그 이념의 정치력이 여전히 존재하는 한 내부에 대한 성찰은 실행될 수 없기 때문이며, 이념의 환상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또 다른 이념의 밀물들이 몰려들어 지난 이념의 내적 성찰을 통한 자기 갱신을 훼방하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에선 생각이 진전하질 못하다. 그것을 두고 한 인물은 말한다. “왜인지 알아? 웡은 스스로에게 물었고 대답했다. 이곳은 지옥이기 때문이야, 지옥에선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생각을 연결할 수는 없어, 생각을 연결하는 것은 미래를 향한 행동이기 때문이야.” 소설의 문제는 행동의 불가능성이 생각을 동동거리게 만드는데, 그 생각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생각을 행동으로 만드는 한 가지 방법은 대화이다. 대화의 원환적 연결이 전진적 연결의 또아리가 되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이 대화로 가득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대화 역시 생각의 그물에 사로잡혀 있다. 생각이라는 단어의 빈도수(192)는 행동(15)과 침묵(11)은 물론이고 대화(38)의 빈도수를 압도한다. 여기에서 인물들은 상황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고립된 상황은 반복되고 사람들은 사라진다.” ‘나’는 부단히 발설되지만, 언어를 떠나 실체로서의 ‘나’는 언제나 모호하고 불확정적이다. 인물들이 결국 어떤 결론에 다다르긴 한다. 한 인물은 ‘게임’으로서의 저항의 양식을 고민한다. ‘나’의 최종적 귀착지가 된 소설가는 끊임없는 피로 속에서도 습관처럼 일어나는 매순간의 ‘할 일’에서 의미를 찾는다. 그것은 영원할 것이다(작품의 제목은 여기에서 왔다.) 이 생각은 체코의 저항문인 바츨라프 벤다의 ‘병행정치’에 대한 구상으로 발전한다.(구글링으로 검색했더니, 병행정치의 ‘정치’는 polis의 번역이다. 다시 말해 병행공간(도시국가)이다. 이는 정치에 병행하는 것이 정치적인 효과를 겨냥하는가, 라는 질문을 야기한다. 이 물음을 굳이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일종의 ‘사회적인 것의 정치력’이라면, 그것은 하버마스(그리고 이글턴)의 ‘공적 영역public sphere’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고, 이러한 병행 공간은 1970년대 한국의 문학장을 통해 이미 훌륭하게 구현된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가가 생각하는 공간은 다른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고 그렇다면 작가의 생각에 대한 궁금증이 인다.) 여하튼 이 구상도 생각의 껍질 속에서 여전히 부화를 기다리고 있다. 언어가 그 자체로서 행동이 되는 사건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듯하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의문을 적는다. 후반부에 슬그머니 개입하는 소설가 ‘나’는 얼마만큼의 유효성을 가진 것일까? 또한 거기에 피력되어 있는 실제 현실의 인물들과 소설론은? 그것이 언어의 수행성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은 순수한 질문이다.


◇구효서· 소설가

◊ 김선재 《노라와 모라》

‘흔적’이란 말이 눈에 띈다.

시점의 한 축인 노라는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흔적을 좀처럼 찾지 못한다.

시점의 다른 한 축인 모라는 옆집의 김용지 씨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다.

“쟤들에게 지나온 시간만큼의 흔적이 남아 있으니까요.”

쟤들이란 물난리 때 김지용이 무엇보다 먼저 구출한 자신 소유의 헌책들을 말한다.

아버지를 기억하지 않는 엄마를 보며 다시 노라는 생각한다. ‘한때 살았던 사람인데, 7년이나 온갖 것들을 섞으며 같이 산 사람과의 기억이나 흔적들이 어떻게 그리 말끔하게 없어질 수 있었을까.’

공교롭게도 이 7은 노라와 모라가 함께 살았던 시간의 숫자이기도 하다. 노라의 엄마는 모라의 아버지와 재혼하게 되고 나이가 같은 중학생 노라와 모라는 한 방에서 7년을 지내게 됐었으니까.

엄마에게 향했던 질문이 그러니까 이제는 노라 자신을 향하게 된 것이다. 노라 엄마와 모라 아버지가 헤어지면서 다시는 볼 수 없었던 모라를 노라가 20년 만에 만나게 되면서.

노라에게는 모라의 어떤 흔적이, 모라에게는 노라의 어떤 흔적이 남아 있었던 걸까. 서로가 서로에게 남긴 흔적을 더듬기 위해 소설은 시점을 두 인물에게 딱 반반씩 나누어 준다.

흔적은 ‘痕跡’이다. 병질의 자취를 의미한다. 병의 흔적. 아픔 혹은 고통의 이력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나간 일들로서 이제 더는 아픔이나 고통이 아니라는 뜻도 포함한다.

생각하면 환지통처럼 아프지만 상처가 아물어 더는 고통이 아닌 것.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을 연민이라 할 수 있겠으나 ‘한 번 감상에 젖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으므로 ‘연민에 빠지지 않’으려 애써왔다고 모라는 노라처럼 고백한다.

한때 의붓자매였던 모라와 노라 사이(라기보다는 태도)도 그러했거니와 그들이 세상을 대하는 방식도 열정과 냉정, 기억과 망각, 불화와 화해, 욕설과 유머의 양극 속에서 때로는 긴장으로 때로는 여유로 균형을 맞추어가는 것이었다. 하나일 수도 둘일 수도 없는 외로운 방식으로 어린 의붓자매가 작은방에서 7년을 기거할 수 있으려면 두 사람의 여린 의지보다는 차라리 열정과 냉정이라는 추상이 하나가 되어버리는 게 낫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태풍이 지나가던 어느 밤 신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불가사의처럼 그 일이 일어난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장면이다.

어린 시절 그날 밤의 ‘흔적’이 없었더라면 20년 만의 만남도 지난 한때의 회상도 쉽지 않았을지 모르며 노라가 호씨의 웃음에 마주 웃거나 모라가 김용지의 삶을 선선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냉정이 온정이 되고 망각이 추억이 되며 나아가 ‘내 몸의 일부가 된 모르는 것들로 내가 여기까지 온 것 같다.’는 인식에 도달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이처럼 두 개의 항목이 하나로 되거나 하나가 다른 하나를 품거나 아니면 하나가 있음으로써 다른 하나가 가능해지는 알 수 없는 영역의 이야기를 가만히 꺼내어 찬찬히 또렷하게 보여주는 김선재의 문장은 독자를 작품에 바투 갖다 세우고 꼼짝못하게 한다.

읽는 행복은 한 줄 한 줄 쓰는 작가의 행복에서 전해 오는 게 아닐까.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인간은 무언가를 떠올리고 그것을 하염없이 적거나 말하는 동물일 거라는 생각마저 든다. 자신이 다시 그걸 읽거나 남들한테 들려주는.

쌓인 것을 하나하나 떠올리다 보면 꼬리를 물고 한없이 딸려 나오는 게 추억의 속성이라면, 그것을 끝없이 적어 내려가는 게 작가의 애틋한 숙명이라는 걸 이 작품은 한 번 더 명확히 보여준다.

◊ 우다영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

도무지 알 수 없어서 지루한 소설이 있는가 하면 도무지 알 수 없어서 재밌는 소설이 있다. 우다영의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이 그런 소설이다.

도무지 모르겠어서 갈 바를 잃고 헤맬 수밖에 없는 길이 미로인데 과연 세 번째 단편 제목이 <해변 미로>다. 실은 이 작품집의 모든 작품이 미로다.

지루한 소설과 재밌는 소설이 있듯이, 끝없이 탈출을 재촉하는 미로가 있는가 하면 탈출을 잊게 하는 미로가 있다. 미로를 만드는 자는 미로를 끝없이 확장함으로써 미로 안에 있으면서도 미로에 갇히지 않는다.

우다영의 미로 소설은 콜롬비아의 백년동안의 고독을 생각나게 하고 아르헨티나의 픽션들을 떠올리게 한다. 2,3차원의 남아메리카 매직 리얼리즘이 마르께스의 평면 판타지라면 3,4차원의 미로는 드 브로이, 아인슈타인, 에셔와 동시대인이었던 보르헤스의 입체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인 미로는, 끝없이 계단을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건물 옥상에 다다르고, 날아가는 새들이 정작은 날아오는 새며, 그려지는 손이 그리는 손을 그리는 에셔의 기이한 판화와 닮아 있다. 동시에 이것이며 저것인 세계를 과학과 미술과 문학이 다투어 상상할 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에서 얻게 되는 신이한 흥미며 다른 차원에서 진행되는 데칼코마니 세계의 깜짝 발견이다.

우다영의 소설은 이와 같은 다른 세계의 발견을 좀 더 용이하게 하기 위해 복합적인 시점(視點)을 꾀할 뿐 아니라 삶과 죽음의 시점(時點)을 동시에 가져가는 파격을 개의치 않으며 이중 삼중의 인물 중첩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나는 너고 그며, 죽은 너가 나로 살아있다는 것을 그의 기억으로 말한다.

이러하니 도무지 알 수 없고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질지 한 치도 예측할 수 없는데 어째서 흥미진진한 걸까. 알 수 없고 예측 할 수 없는, 그래서 신기할 수밖에 없는 것들만 작가가 골라 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달리 말하면 작가는 우리가 어떤 것을 알고 어떤 것을 버릇처럼 예측하는지, 그리하여 어떤 ‘빤한 미로’에 속속 갇히는지를 간파하여 전혀 다른 미로, 끝이 없어 이미 우주로 열린 새로운 미로의 세계를 선사하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를 빤한 미로 속에 가두었던 소설을 열고 찢고 구겨버리거나 때로는 문득 아무렇지도 않게 통과해 버림으로써 우리를 가두었던 소설이 우리가 그토록 애써 만들어 놓은 미로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

작가는 그런 것들을 설명과 설득이 아닌 재치 있는 상상과 일상의 세부들로 상쾌하게 쌓아 나아간다. 4차원의 기이한 상상력을 지금 여기 3차원 경험의 구체들로 엮는 절묘한 기술이 있다. 신 혹은 우연적 필연을 말할 때도 형이상학의 언어보다는 댐으로 투신하는 직장 동료 김씨의 사연을 끌어오고 여행의 목적지에서 산불이 나 많은 사람들이 죽은 사건으로 대체하며 아빠가 앵무새를 실수로 밟아 죽게 한 기억들을 떠올리는 재치를 발휘한다.

작가는 미로를 만들고 미로는 작가를 만든다. 이 작품집이 그려낸 오묘한 작가의 모습이 오히려 오롯하다.

◊ 정지돈 《모든 것은 영원했다》

정지돈 식으로 정지돈의 소설을 말할 수 있을까. 마음 내키는 대로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게 곧 정지돈 식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게 정지돈 식이 아닌가, 모르겠다.

건축가 김중업(5공화국 군사정권 하에서 우여곡절 끝에 올림픽 공원 평화의 문을 시작하고 완성과 함께 세상을 떠난 그의 건축 박물관은 그를 3공화국으로부터 프랑스로 추방당하게 만든 경기도 ‘광주 대단지 사건(1971)’의 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안양에 있다. 그는 이래저래 두 군사정권으로부터 고난을 당했다)을 장 뤽 고다르가 다큐 영화로 찍었다는 사실을 나는 정지돈의 단편 <건축이냐 혁명이냐>에서 처음 알고 놀랐다. 그래서 파리에 갔을 때 <네 멋대로 살아라>를 상영했던 시네마 드 팡테옹을 기웃거렸고,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야네스 바르다의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을 보다가는 끝 장면에서 “아, 고다르가 아직 안 죽었나 보네!”하고 멍청한 소리를 질렀다. 이것이 정지돈의 박학한 소설이 초래한 나의 맥락 없는 촌스러움이다.

정지돈의 소설을 읽다보면, 너무 많은 책 때문에 위축되다가 끝내는 저항심마저 생겨 와락 방화의 충동마저 불러일으켰던 저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 도서관 롱룸을 방문했던 봄날이 떠올랐는데, 나만 그랬던 것은 아닌 듯 소설 속의 ‘젊은 맑시스트’도 정지돈임이 분명한 상대를 향해 ‘네 안의 책들을 불질러버리고 싶다’고 말한다. 120×188의 작은 판형에다 2백 페이지의 짧은 장편인데 참고문헌이 다섯 페이지라니. 그것도 행갈이도 하지 않은.

이 소설 안에 등장하는 책과 사람과 지역과 시대와 사연들은 분명 장편 대하소설로나 풀어야 할 규모인데, 분량이 짧은 데다가 중간 중간 비위 좋게도 훤한 여백까지 심심찮게 품은 이 소설은 그래서 참으로 기이한 형식이 아닌가 싶다. 어째서 이토록 많은 인물과 이야기들이 짧게 줄여지는데도 조금도 더부룩하지 않은 걸까. 그것은 아무래도 이 소설의 형식이 그에 알맞은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태어나서 어떤 시절의 우여곡절을 겪고 끝내는 비운의 죽음을 맞이했다더라는(그럴 거라면 대하로 가야지) 내용 말고, 우연과 필연, 혹은 순간과 영원이 장자가 말했던 영과 망량의 관계와도 같을 거라는 주제 내용 말이다. 내용이 이런 거라면 굳이 연대기적 선구성이 소용없으며 앞뒤 좌우의 설명도 필요 없어 짧아질 수밖에 없고 따라서 맥락을 잇고 말고는 독자들이 알아서 하라는 듯 토막을 내고 시침을 떼거나 그저 밤하늘의 별을 찍듯 조르주 쇠라가 점을 찍듯 모든 이야기를 매번 처음인 양 시작해서 언제 시작했냐는 듯 짧게 끝내버리고 마니 아무리 인물이며 사연이 많은 것 같아 보여도 크지 않은 판형의 2백 페이지짜리 뱃구레가 넉넉히 감당한 것 아닐까.

앞의 우다영의 작품에서도 신, 선, 혹은 악의 존재를 신과 선과 악을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드러내려면 설명과 설득과 얼마간의 지루하고도 친절한 가르침이 필요하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도쿄 기담집》에서 그랬잖은가) 드러내듯이, 정지돈도 선우학원이라는 인물과 정웰링턴의 아내 안나를 통해 ‘믿음의 길은 죽음의 길’이라며 고체이념을 비판한 것을 빼면 대체로 말보다는 몸-바디 랭귀지가 아닌 차라리 침묵에 가까운 고단한 일생 전반의 궤적이란 것-으로 열정과 낭만, 투쟁과 괴멸, 시대와 개인의 숙명적 아이러니를 짧고 강렬하게 점묘한다. 이 소설은 곡절의 가족사고 독립을 염원하던 재미한국인공산주의자들의 투쟁사며 한국해방전후사기도 하지만 한진이 포함된 북한의 모스크바 유학생 집단 망명사건에서처럼 신념에 대한 가열한 회의와 자기 부정을 거쳐 ‘흐르는 근대’에 물처럼 이르고자하는 움직임까지 보여줄 뿐만 아니라 보여주는 소설의 방식조차 유체의 형태를 띠고 있다.

니콜라 레가 자신의 영화에 대해 픽션인지 다큐멘터리인지를 묻는 기자들에게 내 영화 전체를 통칭할 수 있는 말은 없고 생각해보지도 않았습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정지돈이 자신의 이름을 빌려 전하는 이유도 알 것 같다. ‘모든 것은 영원했다’가 정지돈 소설의 제목인데 ‘모든 것’에는 당연히 ‘순간’도 포함된다는 걸 강조하는 말이다. 그러할진대 이 소설에도 통칭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할 것이다. 픽션이든 다큐든 명칭이라는 것이 말 껍데기일 뿐이라면 영화든 소설이든 거기에 갇힐 필요가 없다. 선우학원이라면 분명 죽음의 길이라고 했을 테니까. 자기 소설에 대해 (장편 대하소설 분량을) 경장편으로 가뿐하게 써내는 작가를 처음 봤다.


◇이승우·소설가

◊ 김선재, ‘노라와 모라’

조용하고 끈질긴 응시가 느껴지는 차분한 소설. 섬세한 묘사 사이에 깊은 사유의 문장들이 박혀 있어 가끔 독서를 멈추게 한다. 가령 이런 문장. ‘뭘 모른다는 무구함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더는 순진과 무구가 면죄부가 될 수 없는 나이가 온다.’ 작가는 예사롭게 넘길 수 있는 누군가의 어떤 말을 되새기고 숨은 뜻을 묻는 작업을 반복하는데, 그 과정을 통해 예사로운 말은 예사롭지 않게 되고, 말하는 사람의 특별한 처지가 선명하게 부각된다. 말의 숨은 뜻을 찾아내게 할 뿐 아니라 그 말로 대신하고 정작 하지 않은 말을 유추하게 하기도 한다. 소설은 한때 한 집에서 가족을 이루며 살았던 노라와 모라가 아버지(노라에게는 계부)의 죽음을 계기로 20년만에 재회하면서 과거가 불러내지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노라와 모라의 삶이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단순히 기구한 유년기를 가진 어린아이의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소설은, 우리는 서로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를 묻는 소설이다. “넌…… 모르잖아. 아무것도.” 이것은 20년만에 만난 모라가 노라에게 하는 말이지만, 실은 이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이 다른 인물들에게 한결같이 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노라는 7년간 같이 살았던 계부의 이름이 양판수인지 양판규인지조차 모른다. 소설은 구조가 단순하지는 않은 편인데, 노라의 시점으로 쓰인 부분과 모라의 시점으로 쓰인 부분이 구별되어 있고, 에피소드는 파편적이고 이야기 전개가 시간의 흐름을 충실히 따르고 있지도 않다. 화자는 신중해서 자주 머뭇거린다. 그러나 할 말을 하는 데 실패하지 않는다. 소제목들 가운데 이런 게 있다. ‘눈을 감은 사람’,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말할 수 없는 마음’.

◊ 우다영,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

끝없는 이야기를 하는 소설들이 한 권의 책 안에 들어 있다. 한없이 길게 이어지는 이야기라는 뜻이 아니라 어디로든 펼쳐질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이야기라는 뜻으로. 우다영의 이야기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꼬리 옆에 다른 꼬리가 붙는 방식으로 펼쳐진다. 이 작가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단일한 인과관계로 설명되지 않는 사건들, 알 수 없는 선택과 인물들간의 설명하기 힘든 연대감을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환상과 꿈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상대성이론이나 평행우주 같은 과학적 사유와 신화, 또는 종교적 모티프들을 적절하게 결합한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꿈에서) 이미 살아버린 삶을 (현실에서) 재차 살아내기도 하고(‘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 심령과학의 명제를 반영하기도(‘당신이 있던 풍경의 신과 잠들지 않은 거인’, ‘해변 미로’) 한다. 가시적 세계를 지휘하는 불가시적 세계의 존재를 긍정한다는 점에서, 삶의 모순과 세상의 수수께끼에 답하기 위해 현실 너머의 규칙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그의 소설은 형이상학적이다. 이런 류의 소설들이 빠지곤 하는 두 개의 함정(개연성과 비현실성)에 대한 우려가 없지 않으나 워낙 드문 진지함이라 이 작가의 작품 세계가 반갑지 않을 수 없다. 경험의 축적에 의해 실감이 확보되었을 때 이루어질 성취를 기대하게 된다.

◊ 정지돈, ‘모든 것은 영원했다’

이념적으로 혼란스럽던 해방 무렵, 미국 스파이로 오인받았던 현앨리스의 아들 정웰링턴의 삶을 재구성한 이 소설에는 이 작가의 평소 글쓰기 방식이 그래도 나타나 있다. 풍부한 정보의 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치며 만들어내는, 누구도 그린 적 없는 개성적인 궤적. 때로는 그 궤적에 패턴이 보이지 않아, 소설을 쓰기 위해 자료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료를 사용하기 위해 소설을 이용한다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꼭 어떤 패턴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또 굳이 소설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모든 것은 영원하다’는 소설을 쓰기 위해 자료를 잘 이용한 소설이 분명하다. 책 뒤에는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를 시작으로 5페이지 가량의 참고문헌 목록이 붙어 있다. 아마 허구가 많이 섞였겠지만, 객관적 정보들을 종횡으로 잘 배치해서 넓고 풍부한 배경을 만들고 난세를 살아낸 인물들을 생생하게 살려냈다. 그러나 인문서의 문장처럼 문어적이고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처럼 건조한 작가의 문장은 여전하다. 아마도 작가는 독자들이 인물들의 심정 속으로 들어가 이입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대신 역사적 시공간 속에 서서 실존적 결단을 하도록 유도하려는 의도가 있는지 모르겠다. 공산주의에 대한 열망을 품었으나 어떤 사회에도 속하지 못하고, 어떤 세계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한 채 이국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이 이상주의자의 기록은 정지돈 버전의 ‘광장’이라고 할 만하다.


◇김인숙·소설가

◊ 김선재: 노라와 모라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은 가족. 우연히 한집에 살았다가 우연히 헤어지게된 사람들. 그 가족의 역사에 대해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을 것이고, 눈물과 모욕과 분노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애잔한 그리움도 있을 것이다. 그 모두가 다 과장되기 쉬운 감정들인데, 김선재는 결코 과장하거나 흥분하지 않으며 이 ‘한때의’ 관계를 회상한다. 한때였으나 한때로 흘러가지 않은 것들에 대해. 아마도, 우리에게 존재하는 모든 관계가 그러할 것이라는 듯이. 김선재의 문장은 섬세하고, 따듯하다. 문장에 들어있는 호흡까지 전부 챙긴다. 심표와 마침표와 말줄임표. 그런 것만으로도 말해지는 것들. 어쩌면 그런 것으로만 말해지는 것들. 엄마의 재혼으로 인해 가족이 되었다가 그 결혼이 깨지면서 헤어지게 된 노라와 모라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단순하지 않은 것은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문장의 깊이다.

이야기가 궁금하다기보다 그 다음 문장이 궁금해지는 소설. 그리고 그 문장으로 위로 받는 소설. “왜 저들은 돌아보지 않을까 왜 나에게 사과하지 않을까. 옆구리의 통증이 온몸으로 동그랗게 퍼져나간다. 나만 아는 것. 나에게만 남은 것. 멍처럼 희미해지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어떤 것. 아무 것도 모르는 노라가 길 건너 편에서 나를 향해 손짓한다.”

◊ 우다영 :엘리스 엘리스하고 부르면

어떤 이야기에도 끝은 없어요. 분명히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죠” 소설집의 표제작인 단편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에 나오는 구절이다. 마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화자의 이 대사는 이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며 형식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이야기가 번져나가면서 그 이야기는 다른 세계로 진입하고, 그 세계는 다시 또다른 이야기로 이어진다. 미로처럼 이어지는 이야기들이다. 그 이야기가 지나가는 길 어디쯤에 내가 있는 것일까. “내가 나인 것에는 인과가 없고” 나는 그저 우연히 여기에 있을 뿐이다. 작가의 말에 소개된 문장이 인상적이다.”네 사람은 같은 시간을 다르게 지나왔다. 다르게 기억한 것일까. 아니면 정말 다른 세계였을까.” 다른 기억과 다른 세계에 대한 이야기들로 넘치는, 기이한 매력으로 가득찬 소설집이다.

“언젠가 어디선가 이미 시작되었고, 끝은 사라진” 이야기. “삶이 항상 죽음의 연습”이고 “꿈이 삶의 연습이듯”이 존재하는 세계, “바다이며 밤이며 동시에 우주인 어두운 구멍 속을 아주 오랜 시간, 어쩌면 하나의 기나긴 생애 동안 헤맨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소설들. “그럼에도 이토록 불가해한 모습으로 연결된 세계를 발견할 때면 나는 정말 우리가 우리를 기억하듯 과거로부터 온 존재가 맞는지, 어쩌면 닭과 달걀의 무한하고 단순한 연쇄처럼 미래로부터 시작되어 영원 속에 갇힌 영혼들이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나를 만든 것, 나를 이루고 있는 것들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어째서 먼지나 소음 속으로 흩어지지 않을까요?”

다른 차원과 다른 시간, 그리고 다른 기억을 이야기하는 주제의 소설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많은 소설들이 존재와 기억의 불확정성을 다루었다. 그것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기억에 대해 묻다보면 존재의 자리에 대한 물음으로 갈 수 밖에 없고,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다. 이 낯설지 않은 주제가 우다영의 소설에서 빛이 난다. 예측 불가한 세계를 이처럼 예측불가하게 그리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뜻밖인 것은 이 예측불가한 세계에 대한 감각이나 인식이 허무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도와야죠’라니. 그 믿음과 따듯함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그것조차 무의미한 질문이려나? 그 말에 이어 또 뻗어나갈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이야기는 원점으로 돌아오지 않고 분명히, 계속해서 피어날 것이다.

◊ 정지돈: 모든 것은 영원했다

이 소설은 시대의 격랑에 실린 한 인물의 이야기다. 이념이 전복되고, 세계가 흔들리고 신념이 곤두박질치는 시대. 독립운동가이고 공산주의자였으나, 미국의 스파이로 몰려 북한에서 처형당한 현앨리스의 아들인 정웰링턴은 실존인물이다. 소설은 이 실재했던 인물의 궤적을 쫒아가지만 그의 삶을 복원하려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작가는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언제나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매혹당했다.” 흔히 목숨을 바쳐야했던 시대, 바치지 않을 수 없었던 시대에 무능은 불화다. 시대와의 불화는 관계에 대한 파국으로 이어지고 자기 존재의 부정으로 귀결된다. “정웰링턴의 불능은 그가 가진 적나라한 능력이었다. 거의 남아있지 않은 기록과 목소리, 망각으로서 그렇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망각의 기록이다. 개인이 사라져가는, 소실점의 끝까지 가는 기록.

여러 군데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거의 모든 문장이 여러 겹으로 읽혔다. 소설의 구조 역시 한몸인듯하면서 수많은 층위로 이루어져있다. 시대와 불화하는, 시대의 부조리에 전복당해버린 한 개인의 역사를 딛고, 작가는 다른 지점을 응시한다. 어디쯤, 다른 곳. 어디쯤 다른 시간, 다른 세계. 시간과 장소와 개인을 마구 뒤섞어놓고는 그 뒤섞음을 관통하는 어디쯤인가에 시선을 던진다. 그 시선을 쫒아가다보면 또 어딘가 소실점이 보일듯도 하다. 정웰링턴의 자살은 이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의 죽음처럼도 여겨진다. 그리고 여기에 이제 정웰링턴이 아닌 작가의 육성이 등장한다.

망각하기 위하여 왜 이토록 많은 기억이 필요한가. 기억을 쌓는 것은 무너뜨리기 위해서인가. 텍스트와 이미지가 겹겹이 쌓이다못해 발화하는 소설인데, 그 균형과 질서가 놀랍다. 여러 군데 밑줄을 그을 뿐만 아니라 여러번 읽을 소설이다. 문장과 함께 감각과 생각이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