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주인 봉달호씨

예부터 세상 3대 거짓말은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는 헛말, 노인이 어서 죽어야지 하는 넋두리, 처녀 총각이 결혼하기 싫다는 거절이렷다. 거기에 장사꾼의 거짓말 하나 더 보태면 ‘손님은 왕’이라는 뻔한 미사여구. 장사꾼도 사람인지라, 당연히 손님에 대해 내심 호불호의 감정을 갖는다. “오후 4시에 네가 찾아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그런 손님이 있고, ‘못 벌어도 좋으니 차라리 안 왔으면’ 싶은 손님마저 있다.

편의점은 관계의 폭은 넓지만 깊이는 얕은 곳이다. 다양한 성별, 연령, 직업의 손님들이 하루에도 수백 명 오가지만 눈길 한번 마주치지 않는 손님이 흔하다. 코로나19로 모든 얼굴이 하얀 마스크에 가려진 요즘은 더욱 그렇다. 코로나19 수혜 업종의 하나로 편의점이 꼽힌다지만 또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주택가 편의점은 매출이 오른 점포가 있는 반면, 직장가 편의점은 손님이 반 토막 난 경우가 있고, 유흥가 편의점은 밤 9시 셧다운이 되면서 망연자실 하늘만 바라보는 일상이다. 세상만큼 사람만큼 계절만큼 편의점도 다양하다. 편의점 운영 9년 만에 가장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있는 오늘. 발길 뜸한 가게에서 손님을 기다리며, 그리고 백신을 기다리며, 좋았던 지난날을 떠올리는 마음으로 나의 ‘애정 손님 리스트’를 골라본다.

▶AM 06:00 아메리카노 더블샷, 최씨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국내 판매량은 연간 1억 잔. 지난해 편의점 3사(GS25, CU, 세븐일레븐) 원두커피 판매량은 모두 4억 잔. 코로나19 영향으로 1200원짜리 편의점 커피 판매량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샷 추가도 되고, 카페라테, 카페모카, 다이어트커피는 물론 아포가토 메뉴까지 있으니 이 정도면 웬만한 커피 전문점에 뒤지지 않는다. 가성비를 넘어 가심(心)비를 충족한다.

밤샘 근무의 피곤함이 온몸을 짓누를 시간, 우리 편의점엔 아메리카노를 꼭 더블샷으로 주문하는 손님이 있다. 게다가 두 잔을 결제한다. 빌딩 보안요원 최씨. 한 잔은 자기가 마시고 다른 한 잔은 종종 “사장님 드세요” 하며 내게 건넨다. 1+1 드링크 음료를 사서 하나는 카운터 위에 슬쩍 올려놓고 가기도 한다. 이런 손님이 여럿 계신다. 편의점 통유리로 밝아오는 여명과 함께 가슴이 찡해지는 순간.

/일러스트=유총총

▶AM 10:30 2+1 사내 비밀 커플

편의점에서 2+1 제품을 사려는데, 나는 막상 2개만 필요한데 어떡하죠? 2개만 가져가고 하나는 편의점에 맡겼다 나중에 찾아가시면 된다. 스마트폰 앱을 이용하자. 회사 근처 편의점에서 샀어도 우리 집 앞 편의점에서 찾을 수 있고, 멀리 마라도 편의점에서 꺼낼 수도 있다. 이런 서비스가 있다는 사실, 이제 웬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런데 내가 가진 ‘+1’을 다른 이에게 선물할 수 있다는 정보는 알고 계신지. 카카오톡 같은 메신저를 통해 누구에게든 줄 수 있다!

여기에 사람들이 모르는 비밀이 또 하나 있으니, 손님 가운데 은밀한 커플을 우리 편의점 근무자들은 조용히 알고 있다는 사실. 오전 8시에 들른 남자 손님이 초코우유 두 개를 가져가고 하나는 ‘키핑’했는데, 10시 30분에 여자 손님이 찾아가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짐작한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확신한다. 아―하! 회사 건물 안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다 보니 만날 수 있는 풍경이다. 올해는 둘 사이에 청첩장이 전해오고, +1 아기도 생겨나길.

▶PM 16:50 배꼽 인사 준우

“어서 오세요” 인사하면 살짝 고개라도 끄덕여주는 손님이 좋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라고 했는데 “수고하세요” 응원이 되돌아올 때, 오후 한복판 어깨를 누르던 피로는 씻은 듯 날아간다. 인사하면 항상 받아주는 손님이 있고, 몇 년을 오가도 무뚝뚝한 손님이 있다. 어느 쪽이든 물론 손님이지만, 다정한 손님에게는 더욱 따뜻해지고 싶은 본능 같은 것이 생겨난다.

유독 인사성이 밝은 손님이 한 분 계신다. 편의점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계산대 앞으로 달려와 “안녕하세요” 배꼽 인사부터 하는 손님. 내가 ‘쭌’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여섯 살 준우. 어린이집을 마치고 거의 매일 찾아온다. 계산을 치르면 “고맙습니다” 꾸벅 인사하고 돌아간다. 준우를 볼 때마다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로버트 풀검의 책이 생각난다. 유독 인사를 잘 받아주는 다른 손님이 계셨는데, 그분이 준우 아빠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 놀랐다.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역시...!’

▶PM 18:05 ‘소설 택배’ 아가씨

가지 못하는 마음을 다른 무엇으로 대신하는가 보다. 코로나19로 편의점 택배를 이용하는 손님도 늘었다. 오늘 오후엔 커서 못 입는 아기 옷과 신발을 단정히 박스에 담아 동생네로 부쳐주는 손님의 모습에 절로 아빠 미소가 나왔다. 편의점에는 ‘반값 택배’라는 서비스도 있다. 일반 택배사를 통하지 않고 편의점 물류망을 이용해 이 편의점에서 저 편의점으로 옮기는데, 배송 기간은 하루이틀 길지만 가격은 절반.

퇴근 무렵 찾아와 “내 택배 도착했지요?” 묻는 여자 손님이 있었다. 인터넷 서점 포장지로 보건대 언제나 책이다. “이번엔 무슨 책이에요?” 물으면 구병모, 김연수, 천명관, 어슐러 르귄의 이름을 말하곤 했다. 귀갓길 지하철에서 책장을 넘길 모습을 상상하면 건네주는 마음도 한껏 화사하다. 재택근무가 늘며 한동안 그 택배는 끊기고 손님도 보이지 않는다. 천명관 작가의 새 작품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손님을 기다린다.

▶PM 20:00 꿀꽈배기 정 부장님

우리 편의점이 입주한 건물 관리를 총괄하는 정 부장님은, 코로나 이전에도 그랬지만, 요새 퇴근이 더욱 늦다. 지난달에만 확진자가 세 번 나와 그때마다 건물 전체를 폐쇄하고 집중 방역을 실시했다. 서울 사는 외국인이 한국에서 체험한 코로나19 일상을 스케치하듯 기록한 ‘열병의 나날들’이란 에세이가 있다. 방역으로 편의점 문을 닫아야 하는 날마다 나는 ‘화병의 나날’을 보낸다.

정 부장님은 퇴근길 편의점에 들러 서류 가방을 과자로 채워 돌아가곤 한다. 그래서 정 부장님 가족이 무슨 과자를 좋아하는지 나는 다 안다. 사모님은 짱구, 아드님은 꿀꽈배기, 부장님은 새우깡. 거기에 ‘4캔 만원’ 맥주 곁들여 도란도란 거실 소파에 둘러앉겠지.

저녁 9시. 21세기 신(新)통금의 사이렌이 울리면 거리엔 편의점 불빛만 외로이 남는다. 낮게 깔린 적막이 도심을 덮치며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도 썰물처럼 사라진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오아시스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랬지. 편의점 계산대 안에 홀로 웅크리고 앉아 내가 사랑했던 오아시스를 하나둘 떠올린다. 마스크가 가린 그 얼굴들을 못 본 지도 벌써 1년. 올여름엔, 아니 가을엔, 모든 것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려나? 두근두근 애정했던 손님이든, 설령 좀 꺼렸던 손님이든, 하나같이 그립다. 봉달호·편의점 주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