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김인환·오정희·정과리·구효서·이승우·김인숙)는 최근 비대면 독회를 열곤 2021년 본심의 첫번째 후보 작가로 김금희·정영수·박민정·김혜진을 선정했다. 심사위원회는 지난해 하반기에 출간된 소설 중 8~10월에 나온 작품 20여편을 검토했다.
2021년 동인문학상 1월 독회 심사평 전문
◇김인환·문학평론가
정영수의 소설집 『내일의 연인들』을 읽으면서 작가의 함축적인 문장에 흥미를 느꼈다. 교통 사정으로 차 속에 갇힌 그의 의식은 운전하는 아내에서 시작하여 파킨슨병으로 입원한 동생과 하려고 하는 일마다 못하게 해서 동생을 그렇게 만든 아버지를 거쳐서 움직이지 못하는 차와 같이 답답한 세상을 향해 흐른다. 도로 한복판에 멈춰 서 있는 차처럼 사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흡입과 압축과 팽창과 배기를 반복하고 있다. 「우리들」은 글쓰기에 대한 글쓰기를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글을 써서 온라인으로 판매하고 싶다는 연인들의 글쓰기를 도와주다가 화자는 각각 남편과 아내가 있는 그들이 글과 독자(증인)을 통해 그들의 불안한 관계를 항구적인 사랑으로 변화시키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의 관계는 중도에 끝나지만 나는 그들의 이야기에 헤어진 여자 이야기까지 포함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글을 쓰면서 나는 영원히 혼자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에 대하여 쓰더라도 글쓰기는 결국 고독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 결혼 전의 연애에 대해 서로 터놓고 말하기로 한 부부가 서로 상대방의 고백을 다시 복기하다 보면 생략된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에게도 아내에게 말하지 않은 여자가 있었다. 자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에 그녀를 생각하고 수없이 그녀의 집 주변에서 몇 시간이고 방황했으나 길을 걸으며 이야기한 것이 추억의 전부였다. 그러나 희미한 그림자로 남아 있는 열여덟 살의 첫사랑은 그 이후의 어떤 연애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간절했던 「기적의 시간」이었다.
김혜진의 단편집 『너라는 생활』에는 2인칭으로 지칭되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들이 모여있다. 1인칭 화자는 부차적 인물로 등장한다. 1인칭 소설은 1인칭화자가 자기 이야기를 하는 자기서술과 타인 이야기를 하는 타자서술로 나누어진다. 타자서술에서 1인칭화자를 비인칭화자로 바꾸면 인물시각서술이 된다. 주인공을 2인칭으로 지칭하는 서술방법은 1인칭화자가 3인칭 주인공에 대해서 말하는 1인칭 타자서술의 변형이면서 동시에 비인칭화자가 3인칭 주인공에 대해서 말하는 인물시각서술의 변형이다. 나와 그의 거리보다 나와 너의 거리가 더 가깝게 느껴기 때문에 야기되는 주체성과 주관성의 밀도는 장점이라 하겠으나 3인칭을 2인칭으로 바꾼 데서 야기되는 대상화와 객관화의 동요는 단점이라 하겠다. 동성 애인이건 이성애인이건 우리 시대의 사랑은 어긋남을 피할 수 없다. 독단과 투기와 허학의 시대에는 시야의 융합이 불가능하다. 사랑한다는 행위의 밑에도 의존심과 적개심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의존하고 싶어서 만나고 의존하려는데 받아주지 않으면 의존심이 적개심으로 바뀐다. 이 소설집에 실려 있는 소설들의 공통된 주제는 사랑의 혼란과 파국을 빚어내는 배려와 존중의 결여이다. 부차적 인물인 1인칭화자는 끝내 “너로 인해 보지 않아도 될 것을 보고 듣지 않아도 될 것을 듣고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을 말해야 하는 곤란한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자책을 떨칠 수 없었다”(171쪽).
김금희의 『복자에게』는 특이한 귀향의 이야기이다. 열세 살 때 아버지가 부도를 내서 제주도 고고리 보건소 소장인 고모와 살면서 고고리의 초등학교를 1년, 대정읍의 중학교를 1년 다니다 서울로 와서 판사가 된 화자가 재판을 하다 욕을 했다는 이유로 제주도 서귀포 성산법원으로 가게 된 것이 일차 귀향이고 판사를 그만두고 인권법연구소 파견연구원으로 프랑스에 체류하다가 제주도로 돌아갈 생각을 하는 것이 이차 귀향이다. 일차 귀향은 좌천이지만 이차 귀향은 고복자와 고오세의 우정과 애정에 대한 응답이다. 작가는 판사들이 보내는 나날의 삶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여 판사를 하나의 평범한 개인으로 보게 한다. 판사란 감정을 배제하고 사회의 규약을 수행하는 메마른 직업이며 심한 경우에는 한 주일에 거의 만 장 가까운 페이퍼를 읽어내야 하는 극한 직업이다. 화자는 직장 때문에 프랑스로 따라갈 수 없어서 윤호와 헤어지고 아이를 안고 젖을 먹이며 재판하던 양선배는 이혼을 하고 아이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인천에서 온 배관공 임씨가 이선 고모네 집에 자주 온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복자의 부탁을 거절했다. 본 것을 보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일로 유일한 친구였던 복자와의 사이가 틀어졌다. 임씨가 마을 공사를 기일에 맞추지 못하면서 어떤 한 사람의 일을 했다는 이유로 이선 고모는 동네 사람들의 눈총을 받게 되었다. 금세기 그룹 문화사업팀 대리로 제주도에 와 있는 고오세는 중학 시절에 화자가 준 주소를 들고 화자를 찾아 서울을 헤맨 적이 있었다. 화자는 현주소를 알지 못해서 이전 주소를 주었었다. 제주의 영광의료원에서 2년 동안 30 명의 간호사가 유산을 겪었고 정상 출산의 경우에도 열 명 중 제 명의 아이가 심장질환을 일으켰다. 간호사 두 명이 50명의 환자를 돌봐야 했는데 간호사들은 마스크도 안 쓰고 환기구가 없는 병원 휴게실에서 약을 빻았다. 그 중에는 미국식약국에서 사용을 금지한 약이 17 종이나 들어 있었으나 근로복지 공단은 자료가 미비하다고 하면서 재해로 인정하지 않았다. 복자도 아이를 잃고 남편과 별거중이었다. 소송에 가담한 복자를 동네 사람들은 예전에 이선 고모를 대하듯 서먹하게 바라보았다. 화자는 싸워야 할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만난 고모는 화자의 얼굴에서 빛이 난다고 했다. 병원장의 아내 엘리사벳이 온갖 인맥을 동원하여 재판을 방해하였다. 화자와 복자의 관계와 화자의 병원 기록까지 공개되었다. 화자가 배석에서 제외되고 양선배가 대신 들어갔다. 고모는 청주 교도소에 있는 이규정이란 친구에게 수없이 많은 편지를 썼다. 이규정은 김민준이 도서관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던 날 그를 방조하고 그의 뒷자리를 책임지겠다고 말했다는 죄목으로 구속되었다. 유일한 목격자로서 고모는 그녀가 뛰어내리는 그에게 사랑한다고 했다는 것을 증언하였다. 이규정이 출소하여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이규정이 죽자 고모는 대전에 내려가 연구소 일을 하면서 불구인 그녀의 남편과 열 살 난 그녀의 아이를 보살폈다. 프랑스에 가서야 화자는 타지역의 공공의료원에서도 같은 문제가 발생하여 복자측이 승소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프랑스에서 화자는 복자와 오세를 생각하며 행복을 느낀다. 이 소설의 배면에는 대법원이 청와대의 부속실이 된 시대에도 여전히 생사를 걸고 법에 헌신하는 판사들이 사법부의 구석구석에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작가의 의도가 깔려 있다.
박민정의 소설집에 실린 일곱 편의 소설들은 동일한 폐허에 대한 서로 다른 기록들이다. 새로운 전자기기가 나오면 직장 자체가 위태로워 지기 때문에 전자 세대는 기술적응의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기술의 발달을 따라가기 어렵다는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기술에 예속되면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사물과 사물의 관계로 바뀐다는 것이다. 에로스가 성기성욕으로 축소되어 성이 폭력이 되고 잔인한 냉혹함이 나날의 삶에 침투된다. 성폭행을 당하고 나체가 인터넷에 올라가는 것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되어버린 시대를 박민정은 인간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폐허로 묘사한다. 교수는 학생의 연구 방향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의 방법만 강요하고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만 강요한다. 학생들도 자기들과 생각이 다른 학생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어떤 평균적인 것이 모든 것을 집어삼켜서 누구도 제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살 수 없게 한다. 늘어나는 심리학습상담소는 심리적 공허만 키울 뿐이다. 박민정이 보기에 전자 세대의 공허는 온 세계에 두루 퍼져 있다. 주희는 비즈 목걸이를 주면 가슴을 보여주는 뉴올리언스의 마르디 그라 행렬에 휩쓸리다 옷을 벗지 않았는데도 사진이 찍혀서 인터넷에 떠도는 자기의 영상을 보게 된다. 한국 남자는 필리핀에 가서 거짓말로 필리핀 여자를 유혹하고 필리핀 부자는 한국에 와서 한국 여자 킬러가 된다. 레니와 동거하는 유진은 레니가 셔리스와 여행을 떠난다는 말을 듣고 남녀의 우정이 실제로 가능한가를 시험해 보려고 필중과 필리핀 여행을 갔다가 필중이 죽는 사고를 당한다. 박민정은 우리 시대에는 사랑이 통할 만한 자리가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명동의 화장품 가게에서 일하는 일본인 세실과 한국인 주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오키나와 여학생 집단 자살문제 같은 지뢰가 주위에 깔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서로 존중하고 서로 배려하며, 베이비세터를 하면서 5년 동안 일하고 못 받은 퇴직금 때문에 보험회사와 소송을 하고 있는 고모는 대학원을 나온 조카와 사흘에 한 번씩 문자를 주고받는다. 박민정 소설의 주제는 희망의 결여가 바로 희망의 필요라는 데 있다.
◇오정희·소설가
◊너라는 생활 (김혜진)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이 독특하다. 너라는 지칭으로 상대화한 모든 ‘나’ 들이 드러내보이는 삶의 면모들. ‘너’라는 거울에 비치는 ‘나’의 모습을 다각적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노동과 계급, 성, 우리자신도 의식치 못하는 내면의 불모지 등등 그야말로 우리를 지배하고 이끌어가는 ‘생활’의 모든 것들을 아우르면서 사회적 실존적 문제와 의미를 묻는다. 퀴어커플의 문제를 ‘퀴어’ 에 특정하지 않고 그것또한 인간의 문제, 너와 나의 문제로 폭넓게 보편화시키며 세상의 편견에 대응한다. 삶의 신산함과 부조리함과 자기안의 모순들이 삶의 현장에서 구체성을 획득하며 당대적 한국사회와 그 구성원들의 풍속과 의식, 가치관들을 다양하게 보여줌으로써 질문과 성찰을 유도한다. 대단히 개성적이고 단단한 자신의 목소리를 갖고 있는 작가라는 확신이 든다.
◊내일의 연인들 (정영수)
삶의 불의(不意)함에 대해 그리고 그 쓸쓸함과 근원적 불행감에 대해 내성(內省)가득한 어조로 서술하고 있는 이 작가의 소설들에 대해 나는 어느면에서는 아프고 아름답고 애처러운 일종의 성장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하긴 성장을 인생 어느 한시기 물리적 시간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이란 죽을 때까지 성장해야 하는 존재라면 우리에게 작용하는 그 모든 것에 ‘성장’이라는 전제를 달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위태로울 정도로 지극히 민감하고 섬세한 감정의 결들이 만나고 비껴가고 빚어내는 순도높은 연애소설이라고도 보여진다. 필사적으로 환상을 걷어낸 자리에 드러나는, 환멸이 아닌 아름다움과 정갈한 빈방에 드리우는 적막감이 독후감으로 오래 남는다.
◊복자에게 (김금희)
부모의 사업실패로 이산가족이 되어 제주도의 부속섬에서 보낸 10대초반의 2년 생활과 십년후 판사가 되어 그곳에 부임했다가 떠나기까지의 생활이 서술되어 있는 이 소설은 화자가 판사생활을 접고 사설기관인 ‘인권법률연구소’ 파견연구원으로 파리에 체류하고 있는 현재의 시점에서 끝난다. 발랄하고 단단한 문장, 때로 시니컬하고 때로 한없이 다정하기도 한 자유자재로운 구사력이 무엇보다도 장점으로 두드러진다. 일반인들로서는 깊이 알기 어려운 법원, 법조계를 들여다보는 재미와 호기심을 충족시킨다. 세밀한 관찰력과 성실하고 진지한 접근도 돋보인다.
길지 않은 경장편 안에 등장인물들 즉 친구인 고복자, 홍유, 동생, 정희고모, 고오세 등등의 많은 인물들이 파편처럼 흩뿌려져 있어 다초점렌즈로 보는 소설같다는 느낌이고 제주도에서 보낸 어린시절 2년간의 전반부와 다시 제주도로 내려간 후반부와의 연결이 자연스럽지 못해 소설의 집중적인 힘을 약화시킨다는 느낌도 있다. .
각 개인들이 사회적 가정적으로 받게 마련인 상처들에 어떻게 대응하고 어떻게 사랑과 ‘올바름’의 가치를 추구해나가는가, 자신의 시대, 주어진 삶을 어떻게 고민하고 껴안는가를 사랑과 따뜻한 빛으로 조명하고 있는 점이 소중한 덕목이라 여겨진다.
◇정과리·문학평론가
1. 감회
동인문학상의 대대적 개편 원년부터 심사위원직을 맡으셨던 김화영 선생께서 지난 연말에 퇴진하셨다. 20년 이상 가까이 모시면서 동고동락했던 사람으로서 개인적인 감회가 없을 수 없다. 김화영 선생님은 노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 달의 독회에 가장 열성적으로 작품을 읽어오시고 당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셨으니, 저와 같은 후학에게는 한결같은 자극이자 비평적 모범이 되어주셨다. 때문에 지근거리에 계신다는 사실 자체가 기쁨이자 축복이었는데, 아마도 더 큰 목표가 있어서 매달 수다한 책들을 읽고 의견을 피력해야 하는 노역을 벗어나기로 결심하신 듯하다. 사정이 그렇다면 별 수없이 자유의 획득을 축원드려야 할 것이나 미련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이다. 그동안의 가르침에 감사를 드리며 부디 스스로 즐거운 일 속에서 열락하시기를 빈다.
2. 전반적인 느낌
엄청나게 많은 소설들이 쏟아지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방에서 상상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그럴 게다. 그런데 양적 풍성함이 종류의 다양성을 보장해주는 지는 모르겠다. 여전히 한국소설은 ‘자기 이야기’를 사회적 문제와 동일시하는 경향을 이어가고 있다. 아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한국소설이 그런 게 아니라 한국 독자들이, 고급 독자들까지 포함하여, 그런 소설들을 원해 왔고 여전히 그러하다고 말하는 게 바를 것이다. 이 개인=사회의 협소한 울타리 바깥에 두 개의 경향이 여하튼 그게 무엇이든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게 보이기 때문이다. 한 쪽에는 ‘나’의 개입없이 오로지 세상 이야기를 하는 소설들이 있다. 이 방향의 작품들은 실제로 문학에 대한 사회적 담론으로부터 얼마간 비켜선 장소에서 끊임없이 양산되어 왔다. 체험의 깊이가 부여되지가 않아 통속적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그 한계를 뛰어넘으려 한 소설들도 꾸준히 생산되어 온 것도 사실인데, 고급 독자들조차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지 않다. 독서도 일종의 ‘추세’임을 보여주는 것인가? 반대 방향에서는 자기 이야기에 어떠한 사회적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일종의 자가 실험 속에 집중하는 소설들이 있다. 옛날엔 이런 소설을 두고, 자동사적 소설, 혹은 소통을 거부하고자 하는 시도로 흔히 해석해 왔는데, 그러나 이 소설들은 결코 자족적이지 않으며(즉 바깥의 어떤 지향이 있다), 또한 소통을 거부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소통을 적극적으로 갈망하는데, 그들이 꿈꾸는 소통이란 사회적 소통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범우주적이고 심장 깊숙한 곳에서 일어나는 육체적 소통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다.(내가 공적 결정과는 별도로, 김멜라의 『적어도 두 번』을 지난해 최고의 발견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데, 한국의 독자들은 이런 소설들을 ‘난해’라는 딱지를 붙여 외면하거나 혹은 작품의 이해가 결여된 채로 그 돌출적 신기함에 대해 모호한 환대를 보여 왔다. 두 경우를 모두 아우른 무관심의 풍조는 실상 미만해 있다.
내가 두려운 것은, 그런 와중에서 새로움을 시도하는 작가들 자신이 일종의 무기력 혹은 매너리즘 속에서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천둥 번개가 울리고 광포한 바람이 그들을 몰아치면 그런 고난이라도 먹고 생존할 터인데, 지금은 적막 속에서 곱은 발걸음을 서성이다가 먼지처럼 흩어지지나 않을까 우려스러운 것이다.
또 하나 최근의 작품들을 보면서 걱정이 되는 것은 ‘개연성’의 현격한 저하 현상이다. ‘환상’이 광범위하게 도입되면서 개연성을 무시하는 태도가 꽤 퍼진 게 사실이지만, 현실 묘사에조차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건 일종의 범주착오라고 할 수 있다. 대신 고유명사의 등장이 빈번해지는 것도 두드러진 현상 중의 하나이다. 실존인물로서의 고유명사는 허구 세계의 양태들에 다양하게 개입하기 위해 ‘치고 빠지는’ 게 통상적인 기능인데, 요즘은 그보다는 일종의 뽐내는 장신구로서의 액세서리로 쓰이는 경우가 더 많은 듯하다. 어떤 세목이든 문학에서 장식으로 쓰는 건 타기해야 할 일이 아닌가?
3. 김금희의 『복자에게』
『복자에게』는 개인-사회의 연결선을 예각적으로 다듬었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또한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진화가 매우 가파른 상승곡선을 통해 진행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오랜 습작의 결과로 보이는 유연한 문장과 재기있는 비유를 잘 배합함으로써 소설의 흐름을 자연스럼게 하고, 그 품격을 끌어올리고 있어서, 기초가 단단한 작가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강화한다.
이 소설은 가난하게 자라 오로지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한 인물의 일종의 ‘청결한’ 시선을 통해서 한국인들의 시민의식을 조감하는 것으로 시종한다. 그러한 조감으로부터 소설은 한국인의 의식이 여전히 종족 중심적 자기 환상, 즉 김주연이 ‘취락주의’라 명명하고 김현이 ‘샤머니즘’이라고 불렀던 집단적 습속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거듭 재확인한다. 소설의 전체적인 전개는 그것이 어떻게 사회적 힘을 얻으며 폭압적 세계를 만들게 되는가를 박진히 묘사하는 데 바쳐져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의 초점은 풍속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그 풍속이 획일화된 관념을 조성하면서 다른 삶들의 가능성의 싹을 짓밟아버리는 데 대한 안타까움에 있다. ‘고고리섬’이라는 이름이 환기하는 바가 그것이다. 작품의 제목은 그렇게 잘려나간 것의 부활에 대한 호소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그리고, 이 작품이 작가의 세계인식과 관계없이, 엥겔스가 파악한 발자크의 리얼리즘처럼, 일깨우는 게 있는데, 그것은 저 감성의 놀라운 변형력과 순환력이다. 그것은 그에 반대하는 합리적 사고에까지 침투한다. 다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것을 자세히 밝히기에는 어려운 난관들이 있다.
4. 박민정의 『바비의 분위기』
『바비의 분위기』는 사회성이 아주 짙은 소설들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주목한 것은 사회 문제를 다루어서라기보다, 작가 자신 세대의 삶의 구체성을 통해서 현저히 변모한 사회적 문제틀이 형성되었음을 알리고 그 양상을 인지하게 해준다는 점이다. 세상이 바뀌면 작품의 소도구들이 우선 바뀐다. 그리고 언어도, 어법도, 문제도, 문제 대처방식도 모두 바뀐다. 그걸 가장 여실하게 보여주는 게 이 소설집이다. 길게 보면 같은 얘기인 것 같아도 가까이 보면 아주 다른 얘기다. 그것은 지속적인 주제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흐름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박민정의 소설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면, 무엇보다도 그의 이야기가 사실적 구체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희한하게도 이런 경향은 요즘 젊은 소설들의 ‘분위기 선호 현상’으로부터 반대 방향에 놓인다. 90년대 이후 퍼지기 시작한 분위기 주도 소설이 아니라, 특정한 느낌, 예감, 사소한 대화로 전체를 ‘제유’하는 것이 요즘 소설의 하나의 특징적 경향이라 할 수 있다. 이 특이한 경향은 각 작가들을 사회적으로 모으기보다는 개인화한다. 박민정의 소설은 거꾸로 가는 것 같다. 그의 기법은 정통적이다. 사실을 가리키고 맥락을 따진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함께 토론해야 할 주제에 대한 주목을 요청한다. 이 차이는 진지하게 탐구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5. 김혜진의 『너라는 생활』
소설집, 『너라는 생활』은 너와 나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한 8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단편들은 거의 엇비슷한 형국을 이룬다. 이 작품들의 인물들은 상황에 휩쓸리는 연약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인물들은 거기에 나름의 반응을 하는데 ‘너’와 ‘나’의 반응의 강도가 다르다. 대체로 ‘너’는 좀 더 세고 급한 편이고 ‘나’는 좀 더 유보적이다. 이로부터 세 개의 시간차가 발생한다. 상황은 언제나 인물들을 앞서 나간다 ‘너’의 시간은 ‘나’의 시간을 앞서지만 상황의 시간에 부딪쳐 좌절하기 일쑤다. ‘나’의 시간은 가장 느리고, 그래서 상황을 시야에 담을 수는 있는데, 그러나 상황과 ‘너’를 따라잡을 수가 없어 무기력하다. 이 시간차 때문에 이 작품들의 세 인물(상황까지 포함하여)은 잘못 끼워진 마분지처럼 아무런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덜렁거린다. 하지만 김혜진 소설의 강점은 이 덜렁거리는 구도 내부의 섬세한 움직임을 포착하여 마음의 이랑을 그리는 솜씨에 있다. 작가는 각 인물들의 마음과 동작 하나하나에 곡진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쓰면서 그 결들을 촘촘히 복원해낸다. 때문에 전체의 구도 내에서 보면 두 인물의 허둥지둥은 무의미의 반복적 추락이지만, 각각의 내부에서 보면 생명 운동의 임계치에 다다른다. 독자는 그 사이에 일어나는 어긋남의 인식과 긴장의 느낌 모두를 애틋하게 느낄 것이다. 이때 종래에 상황과 인물들 사이의 어긋남을 증거하던 시간차의 여백은 독자의 생각의 포자들이 날아들어가는 정원으로 변모한다. 다만 그 구도가 작고 한결같기 때문에 생각의 경계도 좁을 수밖에 없다.
◇구효서· 소설가
◊정영수 <내일의 연인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사태에 인물들을 깊이 빠트려놓고, 헤어나지 못하는 그들을 정영수는 짓궂게 내려다본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작게는 얄궂을 크게는 절망적일 경우에 해당할 그런 사례를 정영수는 능청스럽게 잘도 끌어온다. 만연체 같은 긴 그물로 독자를 기척도 없이 어느새 포위해버리곤 했던 이전 창작집에 비해 이번에도 역시 긴 그물이기는 하되 살짝 기척은 있어 보인다. 그런데도 속수무책 포위되어 버리기는 마찬가지.
운명이 걸린 진퇴양난의 경우란 드물겠지만 가만히 따져보면 그런 일은 작게든 크게든 누구에게나 닥치며, 또한 넘치며, 과장까지 하자면 숨을 쉬는 존재의 순간순간일 수 있다. 사랑과 윤리에 관련된 문제에 맞닥뜨려 사랑과 윤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지게 될 때 특히 더 그러하고 정영수의 이번 소설들이 그러하다.
질문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며, 그래서 정영수의 소설들은 묘한 결말에 이를 뿐이다. 사랑과 윤리가 무엇이냐는, 답을 위한 질문이 시나브로 무용해지고 만다. 질문이 유용하려면 그것을 묻는 말의 기세와 의미가 끝까지 유지되어야 하는데 소설이 끝나가면서 사랑과 윤리라는 말들의 개념이 하릴없이 휘발해 버리기 때문이다. 물을 필요가 없고 물을 수 없는 것을 평생 묻는 것. 이보다 더한 곤경이 있을까.
이 곤경 앞에 돌올해지는 것이 실존이다. 실존은 곤경에 앞선다. 곤경이라는 말은 유명론적인 입장에서는 사랑과 윤리라는 말과 동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정영수의 소설들은 답도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도 한 발짝 나아간다. 망했다, 끝이다, 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척간두 진일보의 슬픈 시작이 있다. 슬픔이라고 하는 것은 말의 뜻과 함께 그것에 의해 휘둘리던 욕망이 사라진 자리에 묵언처럼 들어차는 깊은 고독 같은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사태에 빠진 인물들이 불행해보이지만은 않고, 그들을 바라보는 정영수가 끝내 짓궂어 보이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김혜진 <너라는 생활>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소설집에 실린 모든 단편에 등장하는 ‘너’ 아닐까. 인물이라기보다는 너라고 불리는 호칭. 그 호칭에서 모음 안쪽의 점 하나를 바깥쪽에다 찍으면 ‘나’가 된다. 아닌 게 아니라 여덟 편의 단편에 등장하는 ‘너’의 상대는 ‘나’다. 물론 나의 상대는 너다.
이렇게 놓고 보니 과연 나와 너는 점 하나로 달라지는 기호가 된다. 바꿔 말하면, 자모가 전혀 겹치지 않는 영어의 ‘I’와 ‘You’와는 달리 한국어의 나와 너의 차이점은 겨우 점(가장 작은 면적을 일컫는 단위) 하나일 뿐만 아니라 발음에서도 큰 차이가 없다. 김혜진은 이러한 한국어 호칭의 특이점에 착안해 지금껏 없었던 시점 하나를 이번 소설집에서 마련한다. 1인칭도 2인칭도 아니고 그것의 교차시점도 아닌 ‘1, 2인칭 거의 동시 시점’이랄까. 그만의 제 3의 시선으로 현실을 응시하는 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너로써 나를 말하는 것 같고 나로써 너를 말하는 것 같으니까. 전혀 다른 성격과 생활태도를 갖고 있는 경우에마저 어째서 너와 나가 종종 헷갈려 버리고 마는 것일까. 나가 보고 느끼는 너라는 것이 어디까지나 나가 투영될 수밖에 없는 너라서 그럴까. 그래서 나가 아니라면 너는 나가 보는 너가 될 수 없는 것일 테지. 나가 보는 너가 아닐테지. 그럼 다시, 나는 뭐고 너는 뭘까. 나가 보는 너, 너가 보는 나라는 것이 과연 무슨 소용에 닿는 것이기에 점 하나로 나누어 놓은 것일까. 그리고 고작 점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호칭을 나누어 놓았다고 해서 나와 너를 굳이 다르다고까지 지레 여길 필요가 있는 것일까.
이런 기호적 관계의 질문을 김혜진은 ‘나와 너’에서 ‘나/너와 현실/생활’로 확대한다. 그러면서 나의 현실 혹은 너의 생활에서 소유격 ‘의’를 슬쩍 이탈시키는 대신 ‘나라는 현실’ 혹은 ‘너라는 생활’로 아예 구문을 바꾸어 버린다. 나가 주체가 되어 현실을 살거나 너가 생활을 영위하는 게 아니라 나와 현실, 너와 생활은 주객으로 분화되지 못하는(않는) 관계가 된다. 그러면 나/너가 현실/생활을 사는 것이냐 현실/생활이 나/너를 사는 것이냐는 질문에 봉착하게 되고 우리는 마침내 어제까지 보아왔으나 어제까지 보지 못했던 현실/생활과 맞닥뜨리게 된다. 김혜진의 이번 소설의 매력이라고 한다면 그것이라 하겠다. 나와 너,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기호학적 트릭에 갇혀 특별할 것 없던 ‘생활’이, 비로소 특별해진다는 것.*
◊김금희 <복자에게>
소설 안에서도 몇 차례 언급되지만 제주에는 곶자왈이라는 특별한 생태가 있다. 곶은 숲을 뜻하고 자왈은 가시덤불을 뜻한다. 가시덤불로 뒤덮인 원시림 숲이라고 해야겠다.
곶자왈에서 바위와 물을 떼놓을 수 없다. 점성이 높은 용암이 크고 작은 바위로 쪼개져 험한 너덜을 이루는데 이 너덜 아래로 방향 모를 깊은 물이 흐르는 것이다. 겨울에는 물의 온기가 습기를 머금고 바위틈으로 올라 이끼를 키우고 많은 덩굴식물을 살리며 숲을 혹독한 추위로부터 보호한다. 이 기묘한 생태에 이야기들이 없을 수 없어 과연 제주는 신화의 고장으로 불린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신화의 주인공이 대개는 여성으로 의인화 된다는 점.
삼다도의 바위와 물과 여성을 이렇게 이어 붙이려는 까닭은 <복자에게>의 주요인물들이 여성이며, 그들은 요철이 심한 너덜의 환경에 놓여 있고, 방향은 알 수 없으나 어딘가에 분명히 흐르고 있는 물길에 서로 닿아 있으며, 그로 인해 새로운 삶의 신화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방향은 알 수 없으나 어딘가에 분명히 흐르고 있는 물길에 서로 닿아 있다.’라고 쓰는 이유는 소설 속 영초롱이와 정희 고모와 오세의 편지들이 비록 수신인에 도달하지 못하지만 데드 레터(dead letter)의 운명과는 달리 수신인에 도달하고 마는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결과가 아닌 효과라고 쓰는 까닭이 있다. 수신인에게 직접 도달하는 결과를 내는 대신 그것의 도달이 오랜 세월 지연되거나 수신인이 아닌 사람을 거치게 되면서 편지는 훨씬 큰 외연의 곶자왈 생태를 그리는 효과로 나타난다. 태곳적이라면 이러한 사연은 신화가 됐겠지만 요즘엔 사람의 일을 풍경처럼 그리는 좋은 작가를 만나 소슬하면서도 춥지 않은 소설이 된다.
곶자왈의 가시덤불은 험한 돌무더기에서 살아남는 생명력을 스스로 갖는다. 땅을 일구고 물질하던 여인들의 손이 북두갈고리처럼 거칠었던 것처럼 덩굴의 가시도 생존한 자의 늠름한 위력이다. 현실사회에 대한 대칭적 저항과 비판을 넘어 이제 가시덤불 없이는 곶자왈 존재 자체가 무색해지는 지경을 이 소설에서 보기 시작한다.
◇이승우·소설가
◊정영수, ‘내일의 연인들’
정영수 소설의 연인들은 우연한 축복 같은 만남이나 세상이 끝난 것 같은 비극적 이별을 겪지 않는다. 타오르는 불길 같은 열정도 죽음보다 강한 질투도 물론 없다. 사랑이 일상의 일부가 되어 버린(된 지 오래인) 시대의 사랑의 풍속화라고 할만하다. 유일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지만 벗어날 수 없는 것, 반복과 지리멸렬함이 일상의 본색이다. 아마 그것이 이 소설집 속의 화자가 사랑을 대수로운 것으로 구별해서 말하지 않으면서도 줄곧 사랑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한 인물의 연애 서사가 아니라 한 커플이 다른 커플과 어울리며 관찰하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마찬가지. 여러 소설에서 다른 커플들의 연애는 내 연애의 거울로 기능한다. 예컨대 무의식적 모방의 대상.
1인칭 화자는 벌어지는 사건을 보고하는 대신 사건의 배경과 동기, 그리고 그 효과에 대해 주석을 다는 식의 서술을 하는데, 그 문장들은 성찰적이라기보다 방어적이다. 그것은 이 작가가 독자를 설득시키려고 하기 보다 독자에게 이해받으려는 욕망으로 글을 쓴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리고 그 욕망은 대부분 성공한다. 왜냐하면 그의 문장이 그 쪽으로 맞춤하기 때문이다.
◊김혜진, ‘너라는 생활’
“너는 우리의 생활을 위태롭게 하는 사람이고 위협적으로 만드는 사람이다. 정말 이런 생활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나를 꼼짝 못하게 한다.” 그러나 그만 둘 수 없는 것이 생활이다. “네가 없는 생활은 상상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다.”
최근의 김혜진은 ‘생활’에 대해 쓴다. 추상의 ‘삶’이 아니라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현실, 먹고 자고 노동하는 현장. 가령 그는 “불과 나의 자서전”에서 이미 이 소설집 속의 소설 ‘3구역, 1구역’의 핵심 메시지인 주거 공간의 계급적 성격과 고착적 성격, 그리고 인간의 이기적 속성에 대해 날카롭게 다루었고, 또 “9번의 일”에서는 ‘너라는 생활’을 비롯한 대부분의 수록 작품들이 문제삼고 있는 노동 현실을 소설화했다. 우리는 이 소설들을 통해 모든 인간 관계가 갑과 을의 관계라는 것을, 두 사람만 있어도, 심지어 연인 사이에도 이 구조가 작동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인간이 매우 복잡한 존재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자기 이익에 따라 결정하고 움직이는 매우 이기적인 존재라는 사실도 배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현실 세계를 부정할 수 없고 떠날 수 없다는 사실도. 우리의 생활을 위태롭게 하고 위협적으로 하는 사람인 너를 떠날 수 없다는 문장에서 너와 생활은 자연스럽게 동일시된다. 1인칭 시점의 소설에 어울리지 않게 등장하는 ‘너’라는 호칭은 다른 인물들과 섞여 뜻밖의 효과를 만들어내는데, 정서적 친밀도에 따라 나뉘어 표현되게 마련인 현실의 인간관계를 재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박민정, ‘바비의 분위기’
다루고 있는 소재의 다양함이나 이야기의 시의적절함, 그리고 주제의 급진성 같은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 이 소설집이 나에게 인상적인 것은, 작가의 독특한 소설 쓰기 방식이다. 이질적인 여러 재료들을 치밀한 전략에 따라 정교하게 배합하여 그럴듯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재주가 감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여러 가지 색깔의 실들을 모아 짜낸 근사한 피륙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긴 시간 들여 땀 흘린 수고와 정교한 조형술에 의해 탄생한 튼튼한 구조물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필요한 것은 장인의 면모. 솜씨의 공교함, 예컨대 치밀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감각에 호소하거나 감상을 덧씌우는 대신 이 작가는 자료에 근거한 이성적 추론으로 독자를 설득하려고 한다. 어쩌면 작가는 감각이나 감상에 의존하는 글쓰기를 문학적 태만으로 간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 작가가 취재와 추리에 시간을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장인의 성실함과 치밀함이 돋보이는 소설들을 읽으며 산문이 어떠해야 하는지 배운다.
◇김인숙·소설가
◊김혜진 “너라는 생활”
‘너라는 생활’은 여덟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작품집인데, 각각의 소설은 따로따로 있으면서 동시에 연작으로도 읽힌다. 2인칭으로 일관되어 있는 시점과 묘사때문이기도 하지만, 각각의 다른 등장 인물들에게 투사된 시선의 결 때문이기도 하다. 모든 소설이 다 너에게 하는 말, 그러나 결국 내게 묻는 말을 담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너로 읽히는 나’를 보게 된다.
이 소설집의 소설들은 전부 여성 커플을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이 소설들은 최근에 자주 보아 왔던 퀴어 소설과는 결이 다르고, 젠더 문제를 다루는 소설들과도 다르다. 그 둘을 다 품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겉으로 튀어나오기보다는 안으로 밀도 있게 채워졌다. 경계에 선 사람들, 밀려나간 사람들, 그러나 비명을 지르는 대신 가만히 신음하는 사람들을 좋은 문장으로, 적절한 거리를 띄운 채 보여주는 소설들이다.
“도대체 둘이 어떻게 알아본 거야? 그냥 알아봐지는 거야?”
소설 ‘아는 언니’에 나오는 이 대사는 이 소설집 전체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성 커플의 집에 초대되는 ‘아는 언니’. 그 언니에게는 이 커플에 대한 악의도 적의도 없다. 오히려 호의와 이해로 가득차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묻는다. 너희들은 그냥 알아봐지는 거냐고. 그 질문이 품고 있는 선량한 무례, 호의로 가득찬 무지는 경계에 머무르던 이 커플을 경계 바깥으로 밀어버린다. 그래서 이 질문은 다시 독자인 우리에게로 던져진다. 우리는 어디까지 알아야하는 것일까.
2인칭 소설은 작품 속 ‘너’를 정면으로 응시할 뿐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나 ‘그녀’가 아닌 ‘너’에게 던져지는 질문들은 그러나, 직선으로 오지 않고 천천히 에둘러 온다. 이 작품집의 미덕이다.
◊김금희, “복자에게”
고고리섬은 제주에 있는 것으로 설정된 가상의 섬이다. ‘복자에게’는 이 가상의 섬을 배경으로 하여 본섬에서 일어나는 한 의료원의 산재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이 가상의 섬과 이 가상의 사건을 한낱 소설 속 이야기라고 여길 사람은 드물 것이다. 제주는 그 황홀한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때문에, 역사의 상흔이 더욱 생생한 섬이다. 그 상흔이 역사와 함께 다 흘러가버렸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그런 까닭에 어떤 방식으로든지 재생산된다. 그리고 그에 맞서는 대응 방식 또한 마찬가지다. 맞서는 것이든, 끌어안는 것이든, 그것을 삶이 녹아든 웃음으로 승화하는 것이든 그것은 제주만의 것이 되고, 또 그것을 소설로 쓴 김금희만의 것이 된다.
‘복자에게’라는 제목은 소설 속 주인공이 고고리섬에서 만난 친구의 이름이고, 의료원의 산재사고로 인해 아이를 잃은 엄마의 이름이고, 제주 사람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자의 이름이다. 이 이름만큼이나, 이 소설은 여성서사를 단단하게 끌어안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그렇게 살아지도록 되어버린 여성들의 이야기를 단단하게, 그러나 담백하게 그리고 있다. 김금희의 내러티브를 다루는 솜씨는 언제나 그런 것처럼 감탄스러운데, 작가의 말에서 그가 스스로 쓴 것처럼 ‘거룩한 노동’과 ‘책임지는 삶’을 속속들이 녹여내는 넉넉한 위트 때문일 것이다. 삶을 끌어안을 때 비로소 위트가 따듯해진다는 것을 김금희만큼 잘 보여주는 작가는 없다.
책을 읽는 내내 풍경이 생생하다. 그것은 풍경의 묘사 때문이 아니고 그 풍경을 그 풍경 속 사람들과 함께 끌어안아버리는 김금희의 솜씨 때문일 것이다. 따듯한 마음과 아파하는 마음 때문이라고 말해야 더 옳을지도 모르겠다. 역시 김금희는 김금희다.
◊정영수 “내일의 연인들”
“그런데 나는 당연히 알지 못했어. 나도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한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던 일에 대해 ‘우리들’의 등장인물이 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헤어진 후, 누군가는 그들에 대해 이렇게 묻는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정말 어쩌다 헤어졌을까.”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일, 어쩌면 그것이 소위 살아가는 일의 전부인 것이 아닐까. 혹은 살아있음의. 문제는 어떻게 만나 어떻게 헤어져야 잘 사는 일인지 누구도 알 수 없다는 사실. 그래서 한걸음 한걸음 간신히 살아내는 것이 또 살아가는 일이라는 것.
이 스산한 언어반복을, 정영수는 그러나 너무 스산하지도 않게, 너무 쓸쓸하지도 않게, 차곡차곡 보여준다. 연애의 이야기란 대개 진부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만, 그 진부함이 현실의 순간들을 담아내면 갑자기 새로운 이야기가 된다. 내가 다 아는 이야기인데도 마치 이제 막 알게 된 것 같은 그런 느낌.
헤어진 사람들의 빈집을 지키면서도, 스스로 죽음으로 걸어들어가는 늙은 이모의 뒷길을 지키면서도, 정영수는 마지막 문을 닫지 않고 슬몃 열어둔다. ‘마치 물음표를 그리고 있는 듯한 그림자가 아주 서서히 움직여 이모가 있는 아파트까지 다다르는 동안 우리는 바닥에 앉아 말없이 무언가를 기다렸다’ 이모가 있는 이 아파트는 스위스에 있는, 바로 그 이모의 안락사가 진행될 장소다. 그리고 그 순간 거기에 앉아 물음표를 그리고 있는 듯한 그림자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이모의 안락사 결정을 말리지 못한 채 스위스까지 쫒아온 조카 부부다. 그림자가 서서히 물들듯이 물음표도 서서히 다가와 평생 거기 머물 것이다. “왠지 그 밤은 영영 지나가지 않을 것만 같았는데, 그것은 내게 앞으로 다가오거나 다가오지 않을 무수히 많은 행복한 시간들과 외로운 시간들의 징후처럼 느껴졌다.”
많은 문장들을 기억속에 담아가며 읽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많은 일들을 떠올리며.
◊이주혜 ‘자두’
사랑했던, 혹은 사랑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보여주는 마지막 그림자. 속속들이 다 들어가면 보게 되는, 보고싶지 않았던 그것을 무엇이라 말해야 옳을까. 비밀, 내면, 진심…. 뭐라고 이름붙이든 그것은 아마도 누구에게나 있는 것일 터. 그래서 외면하고 싶은 그것을 이주혜는 끈질기게 응시하고 끈질기게 말한다. 순간순간 섬뜩하다. 그런 순간들을 건너가는 방법은 나와는 너무 다르지만 결국 나와 같은 사람을 만나는 것, 혹은 발견하는 것. 그렇게 두 여자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지점에서 이어진다. 흡입력이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