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곡‘호피무늬’로 돌아온‘한국의 마돈나’엄정화. /아메바 컬쳐

역시 ‘센 언니’다웠다. 최근 디지털 싱글 ‘호피 무늬’로 3년 만에 솔로 가수로 돌아온 가요계 디바 엄정화. 1969년생으로 쉰이 넘은 나이지만, 무대 위 그녀에게서 제 나이를 찾아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전신 타이츠 스타일의 딱 맞는 호피 무늬 옷을 입고 긴 머리를 휘날릴 때는 한 마리의 표범. 자기 나이 절반인 가수 화사와 함께 꾸민 무대에서 카리스마는 더욱 빛났다. “벼랑 끝에 매달려 사는 인생, 호피 무늬 옷을 챙겨 입고 나가보자”는 가사처럼 힘들어도 희망은 놓지 말자는 의미. 가사 속 반복되는 ‘호피’와 ‘hop in’(차에 올라타다)은 묘하게 음률을 맞추면서 hope in(희망)을 연상시킨다. 마음의 ‘갑옷’같은 호피 무늬로 중무장하고 거친 세상을 헤쳐나가자는 것이다.

원초적이면서 야성미 넘치는 호피는 기원전 6000년부터 등장했다. 고대 이집트 지혜의 여신 세샤트(Seshat)가 호피 무늬 옷을 입었다. 이후 호피는 왕실의 상징이자 전사, 여신을 뜻했다. 미국의 행위예술가이자 작가인 조 웰던이 쓴 책 ‘강렬한 : 호피 무늬의 역사’(2018)를 보면 호피 무늬는 부(富)와 섹시함, 천박성을 오가며 사랑받거나 외면받았다. 동물 가죽을 입었던 18~19세기엔 상류층의 전유물이었지만, 20세기 들어 인조 섬유가 발달하면서 ‘싸구려’ ‘졸부’ 느낌을 풍기기도 했다.

그래도 결정적인 순간, 여성들은 호피를 입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좀 더 강하게 내고 싶거나 과감하게 포장하고플 때 여지없이 호피가 등장했다. 재클린 오나시스는 해외 순방 뒤 호피 무늬 코트로 시선을 사로잡곤 했다. 1980~1990년대를 풍미한 팝 컬처의 기수 마돈나를 시작으로 ’21세기 팝의 여왕' 비욘세도 호피 무늬 보디슈트(원피스 수영복 스타일 의상)에 호피 무늬 부츠로 무대를 장식했다. 테리사 메이 전(前) 영국 총리는 호피 무늬 구두를 자주 신었다.

블랙핑크에 영감받은 디올 2021 프리폴

‘강한 여성’과 동의어였던 호피가 이제 K팝 걸그룹의 또 다른 상징이 될 것 같다. 디올의 총괄 디자이너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최근 ’2021 프리폴(pre-fall)’ 의상을 선보이면서 “블랙핑크한테 푹 빠졌다”고 했다. 그들에게 영감받은 의상의 주요 테마는 호피. 치우리는 미국 보그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들은 믿을 수 없이 대단하다. 마치 신병훈련소(boot camp)처럼 정말 열심히 한다”고 말했다. 21세기를 이끌어갈 ‘걸 크러시’ 스타로 낙점한 것이다. 디자이너들은 사랑했지만, 과한 느낌에 대중은 난감해했던 호피. ‘멋진 언니’의 호피 무늬가 이번엔 무대에서 뛰쳐나와 거리를 물들일 수 있을까.


블랙핑크에 영감받은 디올 2021 프리폴 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