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사 연구자인 심지연(72) 경남대 명예교수가 우사(尤史) 김규식(1881~1950) 타계 70주기를 맞아 우사 전집을 다시 냈다며 연락했다. “우사는 6·25때 인민군에 납북당해 평북 만포진 별오리에서 돌아가셨다. 10일이 타계 70주기인데 코로나 때문에 추도식 대신 몇 사람만 모이기로 했다.” 착잡한 목소리였다.
망명 당시 서른 초반 한창이었던 우사는 환갑을 훌쩍 넘긴 1945년 11월23일에야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으로 고국 땅을 밟았다. 미국 로노크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지식인이었지만 중국, 소련, 몽골, 프랑스, 미국을 떠돌며 조국 독립에 일생을 바친 투사였다. 우사는 해방 이듬해 다섯살 아래 몽양 여운형과 좌우합작을 이끌었고 1948년 4월 백범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은 당시에도 논란거리였고 북에 이용당했다는 인상이 강하다.
“우사는 미·소가 대립하고 좌우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분단을 막기 위해 무언가 해야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엔 성공하지 못했어도, 오늘날은 교훈을 삼을 수있지 않을까.”
−우사는 좌우합작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
“그도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좌우합작은 미국의 정책이었고 이승만도 우사에게 적극 나서달라고 권유했다.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뭐라도 해야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일부 현대사 연구자들은 이승만을 비판하기 위해 좌우합작과 남북 협상을 치켜세운다. 이승만 때문에 통일정부 수립이 안되고 분단이 이뤄진 것처럼 얘기한다.
“그건 오버한 것이다. 이 박사가 문제가 아니라 스탈린과 김일성의 생각이 전혀 달랐다. 민족 전체 이익을 위해 우리가 뭔가를 해야했다는 차원에서 좌우합작을 봐야 한다.”
한국 현대사 권위자인 이정식 미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는 2006년 낸 책 ‘대한민국의 기원’에 이렇게 썼다. ‘이승만이 우사를 찾아와 좌우합작운동에 나서줄 것을 종용했을 때, “나는 능력도 없고 자신도 없으며, 또 되지 않을 것도 알고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는 처음부터 좌우합작에 대해 크게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김규식은 독립 정부를 세우기 위해 자신의 존재와 경력과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는 생각으로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좌우합작은 우파의 냉소적 태도와 소련 지령을 받은 좌파의 적극적 반대투쟁으로 중간파가 설 자리가 없었다. 박헌영은 당초 중립적 입장을 취했으나, 7월 북한을 다녀온 뒤 소련 군정 실력자이자 미소 공위(共委) 대표인 슈티코프 지령을 받고 좌우합작 반대의사를 명확히 했다. ‘소련은 신전술의 첫 시도인 (1946년) 9월 총파업과 뒤이은 10월 폭동에 대해 자금까지 지원하며 좌우합작운동의 진로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363쪽)
−작년 초 KBS TV가 “이승만은 미국의 괴뢰,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는 김용옥 교수 강의를 내보낼 때부터 이상했다. 이 정부는 201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70주년은 건너뛰고 작년 임시정부 100년을 기념하면서도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은 깔아뭉갰다. 좌우합작이나 남북협상이 반(反)이승만을 위해 동원된다.
“도올은 이 정부의 아이콘같다. 입맛에 맞게 역사를 재단하는 건 있을 수없다. 있던 역사를 어떻게 없앨 수있나. 좌우합작이나 남북협상은 결국 소련과 김일성의 반대 때문에 좌절된 것이지 이승만에게 책임을 씌우는 건 지나친 운동권 논리다.”
−이 정부 사람들은 이승만을 왜 그렇게 미워하나.
“지지세력을 모으는 기제로 활용하는 것같다. 이 정부 지지세력 일부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정통성이 북(北)에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정통성이란 게 한번 있다고 해서 계속 가는 것도 아니고 처음엔 부족해도 채워가는 것이다.”
−좌우합작은 그렇다쳐도 남북협상은 북한 정권 수립을 위한 들러리로 이용당한 것 아닌가.
“우사는 1922년 모스크바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대표로 참석했고, 이듬해 블라디보스톡에서 코민테른 대표를 만나 교섭한 적도 있어 공산당 실체를 잘 알았다. 남북협상에 참여할 때도 김일성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5개 원칙을 전제조건으로 내세웠고, 백범보다 사흘뒤에야 북행길에 올랐다. 북에 이용당할 남북연석회의엔 참석하지 않고, 김일성·김두봉과의 요인회담에만 나갔다. 돌아온 후에도 백범과 달리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반대하지 않았다.”
−좌우합작, 남북협상을 지금 시점에선 어떻게 평가해야 하나.
“외세에 의해 분단을 자체 노력으로 막아야겠다는 시도로 봐야하지 않을까. 스탈린은 소련이 점령한 북한에 공산 정권을 세우겠다는 생각이 분명했고, 미국은 소련 뜻대로 한반도 전체를 내줄 순 없다고 판단했다. 우리가 좌우로 분열되지 않았다면, 그렇게 쉽게 분단되진 않았을 텐데….”
−김규식에 대한 보수의 관심이 덜하다.
“우사는 중도 우파의 대표적 인물이자 보수의 중요한 인적 자산이다. 보수는 이승만이 워낙 공격받으니 그를 방어하기에만 여념없다. 보수의 스펙트럼을 넓히려면 통합에 일생을 바친 우사를 적극적으로 껴안아야한다.”
심지연 교수는 우사 타계 70주기를 맞아 해결해야할 과제로 ‘삼청장’(三淸莊)복원을 꼽았다. 삼청장은 우사가 1945년 귀국후 6·25때 납북될때까지 기거한 사저다. 우남 이승만의 이화장, 백범 사저인 경교장과 함께 해방 정국을 이끈 요람으로 꼽힌다. “이화장과 경교장은 복원, 유지되고 있는데, 삼청장은 청와대 경내로 수용돼 일반인이 접근할 수없다.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기획하고 실행한 이곳을 시민의 품으로 돌려주길 기대한다.”
김규식은 누구?
김규식은 네살 때 아버지가 유배당하고, 다섯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 사실상 고아가 됐다. 병약한 어린 김규식을 언더우드 선교사가 데려가 길렀다. 1897년 언더우드 후원으로 미국 버지니아주 로노크 대학으로 유학가 1903년 졸업한 뒤 이듬해 귀국했다. 졸업연설 ‘극동에서의 러시아’는 대학 잡지에 실리고, 뉴욕 선(Sun)지에 전재될 만큼 이름을 날렸다. 1910년 새문안교회 헌당식 때 교인대표로 봉헌사를 했고, 그해말 이 교회 장로로 선출됐다. 경신중학교 교감, 조선기독교대학 교수로 일하던 우사는 1913년 상해로 망명했다.
1919년 3월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나섰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외무총장에 뽑혔다. 임정 구미위원부 초대위원장, 선전부장, 국무위원을 거쳐 부주석에 취임했다. 1945년 11월23일 김구 주석 일행과 함께 귀국했다.1946년 5월부터 몽양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을 주도했고, 그해 말 미군정이 설립한 과도적 입법기관인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의장에 당선됐다. 1947년 말 좌우합작위원회가 해산하자 이듬해 4월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1950년 9월18일 납북됐고, 그해 12월10일 평안북도 만포진 별오리에서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