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이상한 일을 겪었다. 길을 걷다가 마주 오는 남녀와 마주쳤는데, 그 남녀가 양쪽에서 내 팔을 하나씩 잡았다. 심지어 나는 먼저 가라고 길 한쪽으로 비켜선 상태였기 때문에 더 놀랐다. 어떻게 그렇게도 빨리 팔을 잡았는지도 모르겠다. 팔을 빼낸 나한테 그들은 물었다. “불교를 믿으세요?”라고.
잠시 그들을 노려보고서 다시 가던 길로 걷기 시작했다. 대체 왜 처음 본 남의 몸을 그렇게 마음대로 터치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그것도 1m씩 떨어져 거리두기를 하는 ‘코로나 시대’에 말이다. 낯선 곳에 갔다가 절이 보이면 들어가서 대웅전도 보고 사천왕상도 보고 나오는 나였지만 불교가 싫어질 뻔했다. 그렇게 몸을 만지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들의 말을 들어볼 수도 있었다. 목적 없이 길을 걷는 중(그러니까 산책)이었고,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듣기 좋아하니까.
다시 걸으며 생각했던 것이다. 좀 세련된 포교 방식은 없을까라고. 미남 승려 사진을 쓰며 ‘출가합시다’라는 캠페인을 전개한 한국 조계종의 출가 독려 포스터가 떠오르기도 했고···. 그렇게 다짜고짜 길을 가로막으며 남의 몸을 잡는 건 너무 구시대적인 방식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21세기식 포교방식에 대해 뭔가 색다른 게 없을까라고 생각하면서(아니 대체 내가 왜?) 책을 폈는데 머리말에서 우연히 종교라는 단어를 보았던 것이다.
“바이블이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왜냐하면 요리라는 종교를 제시할 뿐, 그 종교를 꼭 가져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미식 잡학 사전’의 머리말이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강요하지 않는 게 좋다. 세상에는 많은 삶의 방식이 있고, 내가 꼭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을 따를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이디스 워튼의 소설 ‘순수의 시대’의 엘렌 같은 사람인 것이다. 엘렌은 이렇게 말한다. “세련이요! 정말 모두가 그걸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거예요? 각자 자기 방식대로 세련될 수는 없는 건가요?”라고. 엘렌의 말을 내 식대로 바꾸면 이렇게 될 것이다. “음식이요! 정말 모두가 그걸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거예요? 각자 자기 방식대로 먹으면 안 되는 거예요?”라고.
나는 먹는 일을 즐기고 먹는 걸 만드는 일도 즐기고 먹는 일과 관련된 이야기, 레시피, 식재료, 도구, 그릇, 철학에 관심이 있고, 신선하다는 평을 받으며 등장하는 새로운 식당을 경험하는 걸 좋아하지만 동시에 그런 나와 완전히 극단적인 세계관을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도 좋아한다. 이를테면, 먹는 것은 고(苦)이고, 왜 의미 없는 일을 반복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신선한 게 있다. 또 매일 저녁 같은 음식만을 먹는다든가 외식은 꼭 정해놓은 한 군데의 식당에서만 한다든가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관심이 간다. 그 정도면 거의 의식이라고까지 생각되고, 그러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짐작되기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도 그런 사람이었다. 20대 초반 그는 스위스 바젤의 한 서점에서 일을 하고, 또 신문에 짧은 글들을 기고하며 검소하게 살아간다. 그런 그가 한 달의 마지막 날이면 꼭 외식을 했다고 한다. 늘 같은 식당에서 말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그가 먹었던 음식이 어떤 것이었을지 매우 궁금해졌다. 헤세의 장바구니에는 어떤 것이 들어 있었는지, 평소 집에서 먹던 음식과 외식으로 먹었던 음식은 어떤 것이었는지 말이다. 아주 따뜻하고 순한 맛이 나는 평화로운 음식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잠시 머물렀던 독일의 튀빙엔에도 헤세가 일했던 서점이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 그걸 알려준 사람이 저기 보이는 노란 건물이라며 가보라고 했지만 헤세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던 나는 듣고 흘렸었다는 것도. 연대를 짚어보니 헤세가 튀빙엔에서 지낸 건 바젤에서 지내기 전의 일이다. 나는 헤세가 튀빙엔에서도 외식에 대한 이런 루틴을 갖고 있었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러니 헤세가 쓴 글들을 볼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
다시 ‘미식 잡학 사전’으로 돌아와서. 이 책은 요리책은 아니다. 음식에 대한 잡학을 다룬 책으로 제목도 ‘미식 잡학 사전’. 내가 지금 지내고 있는 코워킹 스페이스의 서가에 이 책이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에서 아직까지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는 음식 라디오 프로그램을 책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책을 쓴 사람은 프랑수아 레지스 고드리라는 음식전문 기자인데 어느 날 프랑스 앵테르(France Inter) 사장으로 취임한 필립 발의 전화를 받았다고. 공중파 라디오 채널이라면 음식 주제를 다루는 프로그램이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해서 고드리가 요리 라디오의 진행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프로그램의 이름은 ‘옹 바 데귀스테 On va déguster’, ‘맛 좀 봅시다’라는 뜻이다.
음식 라디오라니! 얼마나 흥미로운 기획인가 싶다. 공중파든 케이블이든 텔레비전은 음식 프로그램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 채널을 돌려도 돌린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기도 하는데… 막상 볼 만한 건 없다. 뭐랄까, 얼마나 많이 먹는지, 맛있게 먹는지, 면 치기 기술이 얼마나 훌륭한지 내기를 하고 또 얼마나 짧은 시간에 ‘신박한’ 음식을 만들어내는지 경쟁한다. ‘한국인의 맛’ 같은 건실한 프로그램도 있고, 내가 모든 음식 프로그램을 아는 건 아니지만, 어디를 틀어도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음식 이미지가 보이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오히려 음식에 대한 즐거움을 빼앗는달까.
‘옹 바 데귀스테’는 식문화 이야기, 실제 주방에서의 만드는 이야기, 다 함께 맛보는 이야기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지금은 잊힌 셰프인 에두아르 니뇽의 로스트 치킨, 맥주를 이용한 요리, 곤충 요리, 베네치아의 요리로부터 양키 스타일의 파티스리까지 미식과 관련된 것이라면 가리지 않는다고.
“음식이 우리 몸에 영양을 채워주듯이, 우리도 음식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즐겁고도 맛있는 미식프로그램을 만들기로 했다.”라는 글을 보는데 정말이지 이런 라디오 프로그램 하나쯤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음식이라는 포용적인 종교에 자발적으로 포교당한 신도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