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하나에 부엌 딸린 가난한 시골 집에 방문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아내는 남편 직업이 식품 회사 ‘사장’이라고 했어요. 의아해서 직원이 몇 명이냐고 묻자 ‘한 명’이라는 답이 돌아왔는데, 알고보니 남편은 뻥튀기 행상이었고 유일한 직원은 아내였습니다. 남편 옆에 서서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한국에서 도시화·산업화가 빠르게 전개되던 1970년대 서울·제주·울릉·강화·평창·속초 등을 답사하며 도시와 농촌 지역 변화상을 연구한 독일인 지리학자 에카르트 데게(81) 킬 대학 교수는 17일 이메일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궁핍했지만 밝고 자긍심 있던 한국 사람들의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현재 독일의 유일한 한국 지리 연구가인 그는 지난 7일 직접 기록한 1970년대 한국 사진(필름) 2만2800여 장 등 방대한 자료를 서울시립대 박물관에 기증했다. 앞서 미 하버드 옌칭 도서관이 복사본을 먼저 소장했고, 원본은 한국에 오게 됐다. 시립대 박물관 관계자는 “70년대 변화상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선물”이라며 “데게 교수는 당시 조사에서 농촌 마을 토지 이용 지도, 가옥 스케치를 비롯해 인구 구조, 가구별 수입 구조, 지붕 개량 및 라디오·TV 소장 여부까지 기록했다”고 말했다.
데게 교수는 독일 본 대학에서 함께 공부했던 고(故) 김도정 전 서울대 교수 초청으로 1971년 한국에 왔다가 한국 연구를 결심했다. 그는 “100년 앞서 독일에서 일어났던 산업화·도시화가 당시 한국에서 훨씬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어 눈앞에서 변화를 지켜볼 수 있는 기회였다”고 했다. 1974~1976년 경희대 객원교수로 부임해 8개 표본 마을을 선정하고 353가정을 집집마다 조사했다.
당시 농촌은 초가 지붕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고 있었다. 데게 교수는 “새마을운동을 ‘농촌 빈곤 미화 프로그램’이라고 깎아내렸던 외신도 있었지만 내가 본 새마을운동은 훨씬 대단했다”고 회고했다. “농민들은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고 협력·혁신을 통해 상황을 눈에 띄게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을 새마을운동을 통해 처음으로 경험했고 ‘할 수 있다’는 정신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2013년까지 매년 한국을 찾으며 산업화 이후 과정도 봤다. 그는 “산업화 초기에 지역 격차가 나타났지만, 이후 각 지역마다 전통을 살린 브랜드를 만들고 관광 개발을 하면서 격차가 줄고 지역적 다양성까지 잘 지켜낸 것 같다”고 했다. 다만 “좁은 국토에 국도, 고속도로, 터널 등 인프라가 계속 새로 지어져 경관을 지나치게 잠식한 것은 아쉽다”고 했다.
그는 1974년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한국에 왔을 때 입양 기관을 통해 부모에게 버림 받은 생후 4개월 지난 한국인 아이를 막내딸로 입양했다. 둘째 아들은 한국학을 전공했고 프랑스 가정으로 입양된 한국인 여성을 만나 결혼했다. 그래서 그는 한국을 ‘제2의 고향’이라고 부른다. 집에는 하회탈, 서예 작품 등 한국 물건이 많아 지인들이 ‘한국 박물관’으로 부를 정도다.
“70년대 한국엔 난폭 운전이 많았어요. 어느 순간 저도 동화됐죠. 독일로 돌아갔을 땐, 음... 다시 적응하느라 애먹었습니다. 한국인이 다 됐던 거죠. 지금은 한국 문화가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어 오랜 기간 한국을 지켜본 연구자로서 자랑스럽습니다.”
기증 사진 중 일부는 서울시립대 박물관에서 10월까지 열리는 한·독 수교 140주년 기념 특별전 ‘지리학자 Dege의 카메라’에서 볼 수 있다. 나머지도 정리·연구 작업을 거친 뒤 공개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