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수비수가 수비 축구 본고장 이탈리아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이적 후 바로 주전을 꿰찬 그가 우승에 핵심 역할을 했다는 점은 현지에서도 이견이 없다. ‘카테나치오(Catenaccio·빗장 수비)’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이탈리아 축구 무대에서 한국에서 온 선수가 ‘통곡의 벽’ ‘철기둥’이라 불리며 수비 축구의 진수를 보여준 것이다.

나폴리 수비수 김민재가 5일 리그 우승을 확정지은후 팬들에게 둘러싸인채 기뻐하고 있다/신화 연합뉴스

김민재(27·나폴리)가 이탈리아 프로축구 1부 리그 세리에A 우승컵 ‘스쿠데토(작은 방패라는 뜻)’를 품에 안았다. 나폴리는 5일 우디네세와 벌인 2022~2023시즌 리그 33라운드 원정 경기에서 1대1로 비겼다. 25승5무3패로 승점 80. 5경기가 남았지만 2위 라치오(승점 64)에 승점 16을 앞서 남은 경기 결과에 관계없이 우승을 확정했다.

◇”킴, 에스프레소에 물 타도 돼!”

김민재는 이번 시즌을 앞두고 페네르바체(튀르키예)에서 나폴리로 이적했다. 유럽 중앙 무대에 도전한 것. 이탈리아 무대를 밟은 한국 선수는 세 번째. 안정환(47·2000년 페루자), 이승우(25·2017년 엘라스 베로나) 다음이다. 수비수는 처음이었다. 그는 국내 K리그와 중국, 튀르키예 무대에서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이탈리아까지 통할까 우려하는 시선이 있었다. 그러나 기우(杞憂)였다.

김민재 머리도 하늘색으로 - 김민재가 우승 확정 후 나폴리 상징 하늘색으로 머리를 물들였다. /나폴리 인스타그램

김민재는 프리시즌 경기부터 선발로 나서더니 개막 후 부동의 주전으로 뛰며 첫 15경기 무패(13승2무)를 이끌었다. 루치아노 스팔레티(64) 나폴리 감독은 그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김민재는 나폴리가 지금까지 치른 리그 33경기 중 32경기를 소화했다. 1경기는 스팔레티 감독이 쉬라고 일부러 뺐다.

기록상으로도 그는 리그 최정상급이다. 리그 경기 중 공격수에게 드리블 돌파를 5회만 허용했는데, 일정 기준(24경기) 이상 뛴 수비수 중 가장 적다. 공중볼 경합이나 태클 능력도 ‘월클(월드 클래스)’이다. 김민재는 원래 시즌 전 첼시로 이적한 핵심 수비수 칼리두 쿨리발리(32) 빈자리를 메우려 데려온 자원이다. 팀은 반신반의했으나 그는 기대를 훨씬 뛰어넘었다. 이탈리아 수비수 전설로 치는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57), 주세페 베르고미(60·이상 은퇴)도 김민재 경기를 보곤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나폴리의 수비수 김민재가 지난 4월 12일 밀라노에서 열린 AC 밀란과 SSC 나폴리의 챔피언스리그 8강 1차전 축구 경기에서 수비를 하고 있다/AFP연합뉴스

김민재가 수비에서 탄탄한 방어벽을 구축하니 나폴리 공격도 살아났다. 나폴리는 올 시즌 리그 최소 실점(23골)에 최다 득점(69골) 팀이다. 나폴리는 올 시즌 킥오프 때 김민재, 아미르 라흐마니(29) 두 센터백과 골키퍼를 제외한 8명이 나란히 중앙선에 있다가 일제히 달려 나가는 모습을 보이곤 했는데, 이는 김민재를 믿기에 가능한 전술이었다. 이탈리아 현지에선 “그 기세에 겁을 먹지 않을 팀은 없다”는 평도 나왔다.

김민재 활약이 워낙 돋보이다 보니 나폴리에선 “김민재는 커피에 물을 타도 된다”는 농담도 나왔다. 축구와 커피는 이탈리아에선 정통이란 자부심이 있다. 2015년 나폴리 한 카페를 찾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에스프레소에 물을 부었다가 “지금 커피를 망치고 계십니다. 우리 나폴리인이 마시는 대로 드세요”라는 핀잔을 들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 그런데 나폴리 시민들은 김민재에게 ‘커피 까방(까임 방지)권’을 준 셈이다. 나폴리 거리엔 김민재 벽화가 있고, 얼마 전 김민재와 용모가 비슷한 것으로 유명한 정동식(43) K리그 심판이 나폴리를 찾았을 때 다들 김민재를 연호하며 몰려드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날 우승 확정 직후 원정 경기장을 찾은 나폴리팬 1만1000여 명은 김민재를 둘러싸고 환희를 감추지 못했다. 팬들이 그에게 너무 몰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

이탈리아 프로축구팀 나폴리가 5일 33년 만에 1부 리그(세리에 A) 우승을 확정 짓자 나폴리는 물론, 이탈리아 전역 팬들이 열광했다. 인구 220만명(광역 기준)이 사는 나폴리 거리 곳곳에선 팀을 상징하는 하늘색 깃발이 내걸렸고, 유니폼을 입은 팬들은 길거리로 뛰쳐나와 밤샘 축제를 벌였다. 사진은 밀라노 대성당 앞에서 나폴리 팬들이 자축하는 모습이다. /AP 연합뉴스

◇마라도나 이후 33년 만에 우승

나폴리 축구 팬과 선수단은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모두 ‘축구 전설’ 디에고 마라도나(1960~2020)를 떠올렸다. 나폴리 홈구장 이름은 스타디오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 마라도나가 세상을 떠난 후 그를 기리기 위해 경기장 이름을 변경했다.

마라도나는 나폴리에선 신(神)같은 존재다. 1984년부터 1991년까지 나폴리에서 활약하며 하위권이던 팀을 1986~87, 1989~90시즌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의 등번호 10번은 나폴리 팀 영구 결번이다.

그러나 나폴리는 마라도나가 떠난 뒤 2부 리그로 떨어지고 파산 선고를 받는 등 우여곡절을 겪고 33년 만에 통산 3번째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스팔레티 감독은 “마라도나의 가호가 있어 우승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빈곤한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나폴리 지역은 올 들어 축구 팀 선전으로 활기가 돌고 있다. 리그에서 승승장구하자 거리엔 팀 상징색인 하늘색 깃발과 선수들 초상화가 곳곳에 걸렸다. 우승이 확정된 이날은 전역이 축제장으로 변했다. 하늘색 연막이 쉴 새 없이 터졌고 시민들은 춤추고 노래했다. 한 대학생은 “축제는 이제 시작이다. 한 달 동안 매일 불꽃놀이가 펼쳐질 예정”이라고 했다. 마라도나 벽화를 찾아 감사 기도를 올리는 모습도 보였다. 이번 나폴리 우승은 그동안 부유한 북중부 지역(토리노, 밀라노, 로마) 축구 팀들이 독식하던 체제에 멋지게 복수한 것이란 해설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