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다저스 오타니 쇼헤이가 18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팀 코리아와 로스앤젤레스(LA) 다저스의 미국 프로야구(MLB) 서울시리즈 연습 경기, 1회말 무사 2루 상황 3루수 파울플라이를 때려내고 있다./뉴스1
16일 LA다저스 전속 카메라맨은 오타니 쇼헤이 부부가 인천공항에 도착한 직후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을 공개했다. /@jon.soohoo

오는 20일 한국에서 최초로 메이저리그(MLB) 공식 개막전이 펼쳐진다. 미국 밖에서 열리는 9번째 MLB 정규리그 개막전이다. LA 다저스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가 서울 고척돔에서 펼치는 MLB 공식 개막전에는 당대 최고의 스타 오타니 쇼헤이(30〮LA 다저스)와 2023 시즌 골드글러브를 수상한 김하성(29〮센디에이고 파드리스)이 출전해 야구 팬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MLB 한국 개막전에 참가하는 선수 중 최고 스타인 오타니는 그의 부인과 함께 한국을 찾아 국내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한국에서 부인과 좋은 추억을 남기고 싶다”고 했다.

102년전 미국 프로야구 선수들은 왜 부인과 함께 조선에 왔을까?

102년 전 조선에서 경기를 펼친 미국 프로야구 선수들 중에도 오타니처럼 부인을 동반한 선수가 있었다. 왜 그랬을까?

당시 미국 프로야구 선발팀은 조선에 오기 전 펼친 일본 초청경기에서 최대한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게 목적이었다. 미국 선발팀의 감독 허버트 헌터가 조선에서 한 경기 치르는 대가로 요구했던 비용은 5천원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5천원이면 스위스 손목시계 1000개를 살 수 있었다. 야구인이었던 이원용은 헌터가 요구한 초청료보다 훨씬 적은 1천원을 제시하며 헌터 감독을 조른 끝에 겨우 조선 초청 경기를 성사시켰다.

조선에서 경기를 마친 미국 프로야구 선수들은 조선 최고의 요리 주점 명월관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이 곳에서는 조선 요리와 조선 가무가 곁들여졌다. 선수들은 기생들의 춤사위에 매료돼 앙코르를 청하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명월관 파티에는 미국 야구 선수들의 부인들도 참가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미국 프로야구 선발팀이 1920년 일본을 찾았을 때 발생했던 불미스러운 스캔들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 선수들 중 일부는 팀을 이탈했을 정도로 방탕한 시간을 보냈다.

메이저리그 커미셔너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1922년 아시아 원정경기에 조지 모리아티 심판을 참가시켜 그에게 선수들의 행동을 감시하라는 특명을 내렸으며 기혼자 선수들의 부인도 함께 원정경기에 참여해야 했다.

홈런왕 베이브 루스와 포즈를 취한 이영민. 그는 1934년11월 미국 메이저리그 올스타팀이 일본을 방문해 경기를 가졌을 때, 조선인으로선 유일하게 일본 대표팀에 선발된 야구천재였다. 조선일보 1937년 3월6일자 기사

조선체육회는 왜 美 야구팀 초청 경기를 거부 했나?

1922년 미국 프로야구 선발팀 초청 경기를 성사시킨 주인공은 이원용이었다. 이원용은 미국 프로야구 선발팀이 일본에서 경기를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조선으로 이 팀을 초청하기 위해 발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1천원이라는 미국 프로야구 선발팀 초청료와 제반 비용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원용은 자신이 이사로 재직 중인 조선체육회에 미국 선발팀 초청료를 요청했다. 하지만 조선체육회는 이원용의 제안을 거절했다. 어렵게 모은 조선체육회의 기금을 이런 이벤트에 사용할 수 없다는 게 반대 이유였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교육기관에 몸담고 있던 조선체육회 고위 인사들은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스포츠를 하는 조선의 청년들이 돈을 받고 야구를 하는 프로 선수들과 경기를 하는 것을 받아 들일 수 없었다.

실제로 당시 조선체육계는 스포츠의 상업적 활용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한 예로 인력거꾼이 마라톤 등 육상대회에 출전하는 것을 금지할 정도로 상업적인 요소가 스포츠에 결부되는 것을 꺼려했다. 인력거를 끌며 돈을 받는 인력거꾼은 스포츠계에서 ‘프로 선수’로 치부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원용은 조선체육회 이사직에서 사임하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은행에서 돈을 빌렸다. 다행스럽게도 12월 8일 펼쳐진 미국 프로야구팀 초청 경기는 대성공이었다. 신기한 구경거리에 구름 관중이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겨울철 치고 온화한 날씨도 이벤트 흥행을 도와줬다. 입장료 수입은 1천700원에 달했다.

휘문고보 고시엔 8강의 신호탄이 된 미국 프로야구 선발팀과의 경기

비록 경기에서는 조선 선발팀이 미국 프로야구 선발팀에 23-3으로 대패했지만 의미 있는 유산 하나를 남겼다. 이 경기에서 메이저리그 투수를 상대로 2안타를 기록하며 자신감을 얻게 된 김정식은 1년 뒤 휘문고보가 일본 고시엔 대회 8강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정식과 함께 이 경기에서 활약한 박석윤은 그때 휘문고보의 감독이었다.

‘전원 조선인’ 선수로 구성된 휘문고보의 고시엔 8강은 그 자체로 기념비적이었다. 일제시기 고시엔 대회 지역 예선은 조선, 대만, 만주에서 열렸지만 전원 외국인 선수로 본선에 진출한 학교는 휘문고보가 유일했다.

1934년 조선에 전달된 메이저리그 올스타 팀의 사인

1934년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 등 메이저리그 최정예 올스타 팀이 일본을 찾았다. 이 올스타 팀은 1920년대 일본에 왔던 마이너리그 선수를 포함시켰던 미국 야구 선발팀과는 차원이 달랐다. <요미우리 신문>이 주최한 이 초청 경기는 일본인들이 보고 싶어했던 최고의 이벤트였다. 이벤트 흥행이 대성공을 거둔 뒤 요미우리 신문의 쇼리키 마쓰타로 사장은 일본 프로야구 출범을 기획했고 실제로 2년 뒤 일본 프로야구가 시작됐다.

당시 메이저리그 올스타 팀의 감독 코니 맥은 조선에 메시지를 보냈다. “조선에 가지 못한 것을 우리들의 가장 큰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게 요지였다. 그는 이어 “조선의 스포츠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조선 민족의 젊은이들이 행하고 있는 스포츠가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며 메이저리그 올스타 선수들의 사인을 보내왔다.

메이저리그 올스타 팀은 사인만 전달한 채 조선에 오지 않았다. 조선의 야구팬들은 메이저리그 올스타 팀과 경기를 펼친 일본 대표팀에 유일하게 ‘조선의 베이브 루스’로 불렸던 이영민이 속해 있었다는 것에 그저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90년 뒤 한국 야구팬들은 투타 겸업 이도류(二刀流) 로 ‘21세기 베이브 루스’로 평가받는 오타니를 비롯한 최고의 MLB 스타들의 향연을 볼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