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승에서 지면 결혼기념일 선물을 살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네요.”

다닐 메드베데프(왼쪽)와 그의 아내 다리아 체르니시코바가 2021 US 오픈 우승 기념 트로피를 같이 든 채 기뻐하고 있다. /US 오픈 트위터

작년 US 오픈 남자 단식 결승에서 다닐 메드베데프(26·러시아·세계 1위)는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결승전이 그의 결혼기념일인 9월 12일(현지 시각)에 열렸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박스에선 그의 아내 다리아 체르니시코바(26)가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네트 건너편에는 역대 최고의 테니스 선수 중 하나로 꼽히는 ‘조커(Djoker)’ 노바크 조코비치(35·세르비아·세계 6위)가 버티고 있었다. 조코비치는 한 해에 메이저 대회(호주 오픈, 프랑스 오픈, 윔블던, US 오픈)를 모두 제패하는 ‘캘린더 그랜드 슬램’이라는 진기록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4~5시간 혈투도 충분히 예상됐다.

하지만 우승과 함께 결혼 선물도 챙기는 여유로운 남편의 모습을 보이고 싶었는지, 메드베데프는 키 198㎝의 이점을 살린 타점 높은 빠른 서브와 막강한 스트로크를 퍼부으며 2시간 15분 만에 세트스코어 3대0(6-4 6-4 6-4)으로 조코비치를 압도했다.

다닐 메드베데프(오른쪽)와 노바크 조코비치가 2021 US 오픈 결승 이후 세리모니 현장에서 대화를 나누며 웃고 있다. /Getty Images

메드베데프는 이 우승으로 최고의 결혼기념일 선물과 더불어 생애 첫 메이저 대회 타이틀을 쟁취했다. 그는 예브게니 카펠니코프(48)와 마라트 사핀(42) 이후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린 세 번째 러시아 남자 선수가 됐다. 마라트 사핀(2005 호주 오픈) 이후 16년만의 메이저 대회 우승이기도 했다.

그래도 주인공이 마지막에 등장하듯, 우승 인터뷰의 막바지는 그의 아내에게 할애했다. 메드베데프는 “사랑하고 고마워 다샤(다리아의 애칭)”라고 수줍게 속삭이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메드베데프는 그간 여러 인터뷰에서 그의 성공을 아내에게 돌린 바 있다.

◇동갑내기 커플, 12살에 테니스 코트에서 처음 만나 결혼까지

메드베데프와 체르니시코바는 1996년생 동갑내기 커플로 알려졌다. 나이가 같으니 삶의 궤적도 비슷했다. 테니스 선수라는 공통점도 한 때 공유했다. 체르니시코바는 한 인터뷰에서 둘의 관계에 대해 털어놓았다.

비록 부상으로 테니스를 관두게 됐지만, 체르니시코바 역시 어릴 적에 프로 테니스 선수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도 여느 테니스 선수처럼 열심히 훈련하고 주니어 대회에 출전하며 차근차근 실력을 쌓는 과정을 거쳤다. 메드베데프를 처음 본 것도 한 주니어 대회에서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12살이던 체르니시코바는 한 주니어 대회에 출전해 점심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웬 절규와 테니스 라켓이 내동댕이쳐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체르니시코바의 어머니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한 동료의 아버지가 혀를 내두르며 “다닐 메드베데프라는 친구가 경기를 하고 있네요. 이 친구 모르세요?”라고 되물었고, 다 같이 메드베데프의 경기를 직접 보러 가게 됐다고 한다.

메드베데프가 3시간이 넘는 대결을 벌이는 동안 체르니시코바는 그의 기술과 투지에 반했다. 체르니시코바는 “메드베데프는 아무리 게임에서 뒤처져도 이기기 위해 코트 위에서 무엇이든 할 준비가 돼 있는 선수였다”며 “이런 면에서 보면 그는 하나도 변한 게 없다”고 웃었다.

강렬한 첫인상을 남긴 메드베데프는 이후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체르니시코바와 교제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곤 약 4년간의 열애 끝에 2018년 9월 12일 모스크바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다.

다닐 메드베데프(오른쪽)와 그의 아내의 결혼식 모습. /메드베데프 인스타그램

◇결혼 이후 환골탈태, 세계 ‘톱 10′ 진입

결혼 이후 메드베데프는 이듬해에 날개를 달고 비상했다. 사랑의 힘으로 한 수 위 기량을 발휘하며 거침없이 라켓을 휘둘렀다.

한 해의 첫 메이저 대회인 1월 호주 오픈에선 처음으로 메이저 대회 시드 배정을 받고 16강까지 진출했다. 당시 메드베데프의 메이저 대회 출전 최고 성적이었다.

이후 2월엔 남자 프로 테니스 대회 중 메이저 대회 다음의 위상과 권위를 자랑하는 마스터스 1000(총 9개의 대회) 몬테 카를로 대회에서 당시 세계 1위였던 조코비치를 꺾는 기염을 토해내며 준결승까지 올랐다. 커리어 사상 세계 1위를 상대로 거둔 첫 승이었다. 그해 7월 윔블던에선 3회전까지 진출하며 처음으로 세계 톱 10에 진입했다.

메드베데프는 8월엔 마침내 마스터스 1000 신시내티 웨스턴&서던 오픈 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커리어 첫 마스터스 1000 대회 타이틀을 일궜다. 세계 5위로 출격한 US 오픈에선 첫 메이저 대회 결승 진출이라는 위업을 이뤘지만, 당시 라파엘 나달(36·스페인·세계3위)에게 5세트 접전 끝에 패하며 아쉬움을 삼켜야만 했다.

10월엔 마스터스 1000 상하이 대회에서 우승의 기쁨을 맛봤다. 이후 2019년을 세계 5위로 마감하며 2018년 랭킹(16위)에 비해 10계단 이상 상승하는 저력을 과시했다.

이러한 성과에 대해 메드베데프는 2019년 9월의 한 인터뷰에서 “결혼하고 나서 두 개의 큰 대회에서 우승하고 톱 10에 진입했다”며 “내가 (돈을) 벌면, 아내가 더 벌 수 있도록 도와준 덕분이다”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올해 세계 1위로 등극하고 US오픈 2연패 노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악재도

메드베데프는 올해 호주 오픈에서도 결승까지 오르는 쾌거를 이뤘다. 하지만 5시간 24분에 이르는 사투 끝에 세트스코어 2대3(6-2 7-6<7-5> 4-6 4-6 5-7)으로 나달에게 석패했다. 이는 메이저 대회 결승 역사상 두 번째로 길었던 경기였다. 가장 길었던 메이저 대회 결승 경기는 조코비치와 나달이 무려 5시간 53분 동안 맞붙은 2012 호주 오픈 결승이다.

메드베데프는 올 2월 드디어 세계 1위로 등극했다. 이른바 ‘테니스 빅4(로저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 앤디 머리)’가 아닌 선수가 세계 최강이 된 건 2004년 2월의 앤디 로딕(40·미국·은퇴) 이후 약 18년만이었다.

프랑스 오픈에선 4회전까지 진출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윔블던엔 아예 출전조차 못했다. 윔블던을 개최하는 올잉글랜드클럽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상황 하에서 “영향을 받는 개인에게는 힘든 일임을 알고 있고, 러시아 지도자들의 행동으로 그들이 고통받는 것은 안타깝다”면서도 “정당하지 않고 전례 없는 군사 침략 상황에서 러시아 정권이 러시아나 벨라루스 선수 출전으로 어떠한 이익이라도 얻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며 러시아와 벨라루스 선수들의 출전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메드베데프는 이러한 조치에 대해 반발하지 않고 수용했다.

오는 29일 2022년의 마지막 메이저 대회인 US 오픈이 시작한다. 메드베데프는 현재 대회를 앞두고 그가 2019년에 우승했던 마스터스 1000 신시내티 웨스턴&서던 오픈 대회 4강에 진출하는 등 2연패를 위해 부단히 예열하고 있다.

올해의 US 오픈 남자 단식 결승은 9월 11일에 열려 그가 결혼기념일 선물을 챙길 시간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