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널을 상대로 21호골을 터뜨린 손흥민. 그가 가는 길은 한국과 아시아 축구의 새 역사가 되고 있다. / 로이터 연합뉴스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국가대표였을 때였나요?

제 학창시절을 지배한 만화 ‘슬램덩크’엔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주인공인 강백호(북산고)는 전국대회 산왕공고전에서 경기 종료를 얼마 남기지 않고 등을 다치고 맙니다. 선수 생명과 직결되는 큰 부상인 탓에 안 감독님이 교체 사인을 내려 하자 강백호가 내뱉은 말입니다. 그리고 강백호는 이렇게 말하고 코트에 남죠.

“난 지금입니다.”

누구나 영광의 시대는 있습니다. 특히 스포츠 선수라면 경력 최고의 순간이 분명히 있겠죠.

프로 스포츠는 보통 연(年) 단위로 시즌이 돌아갑니다. 가장 빛났던 시즌을 커리어 하이 시즌이라고 하고요.

만화 슬램덩크에서 강백호가 안 선생님에게 '영광의 시대'를 물어보는 장면. 만화를 관통하는 명대사 중 하나다. / 슬램덩크

지금 대한민국 최고의 스포츠 스타를 꼽으라면 많은 이들은 손흥민을 얘기할 것입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에서 주전 공격수로 뛰는 그는 올 시즌 리버풀의 세계적인 골잡이 모하메드 살라(이집트)와 치열한 득점왕 경쟁을 펼치고 있습니다.

한국 축구 선수가 유럽 빅 리그에서 뛰어도 대단하다고 여기던 시절이 있었는데 손흥민은 개인 타이틀 중 가장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정규리그 득점왕을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살라가 22골, 손흥민이 21골로 불과 한 골 차입니다.

손흥민이 골든부트(득점왕)를 차지한다면 아시아 선수 최초의 유럽 5대 1부 리그(잉글랜드·스페인·독일·이탈리아·프랑스) 득점왕의 영광도 누립니다.

토트넘에서 벌써 7시즌째. 첫 시즌인 2015-16시즌을 빼곤 손흥민은 매 시즌 18~22골을 집어넣었습니다. 그 꾸준함에 일단 엄지손가락이 절로 올라갑니다.

늘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임팩트 있는 몇몇 시즌을 꼽아 볼 수 있습니다.

2016-17시즌엔 2016년 9월과 2017년 4월, 두 차례 프리미어리그 이달의 선수가 됐습니다. 한 시즌에 두 번 이 상을 받은 최초의 아시아 선수가 된 거죠. 시즌 21골로 차범근의 유럽 한 시즌 최다골(1985-86시즌 19골) 기록도 뛰어넘었습니다.

2018-19시즌(20골)엔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러시아월드컵과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UAE 아시안컵을 모두 소화하는 강행군을 소화하면서도 토트넘을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올려놓았습니다. 비록 리버풀에 밀려 우승을 하진 못했지만, 박지성에 이어 아시아 선수로는 두 번째로 챔피언스리그 결승 무대에 선발 출전했습니다.

22골로 자신의 시즌 최다골 기록을 경신한 2020-21시즌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시아인 최초로 PFA(잉글랜드프로축구선수협회) 올해의 팀에 선정됐고, 선수 활약에 따라 순위를 매기는 프리미어리그 파워랭킹에서 4위를 기록했습니다. 17도움으로 2년 연속 10-10 클럽에도 가입했죠.

앞에 언급한 세 시즌도 대단했지만, 손흥민이 득점왕에 오른다면 올 시즌이 커리어 하이 시즌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15일 번리전에선 아쉽게 득점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한 경기가 더 남아 있습니다.

한국 시각으로 23일 오전 0시에 벌어지는 노리치전입니다.

현재 최하위인 노리치는 강등이 확정된 약팀이라 손흥민이 힘을 더 낸다면 역사적인 득점왕 등극도 꿈꿔볼 만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프리미어리그 2021-22시즌은 한국 스포츠에 영원히 남을 ‘영광의 시대’로 기억되겠죠.

손흥민 외에도 세계 톱 리그에서 이름을 날린 한국 스포츠 스타들이 제법 있습니다.

그들이 가장 빛났던 ‘영광의 시대’를 꼽아 봤습니다. 팀 스포츠 기준으로 코리안 빅 리거들의 베스트 시즌 모음입니다.

프랑크푸르트 시절의 차범근. 그는 한국 축구의 개척자였다. / 조선일보DB

◇ 차범근의 1979-80시즌

차범근은 한국 프로 스포츠 선수로는 처음으로 세계무대에 이름을 떨친 레전드 축구 스타입니다.

당시 최고 리그로 꼽히던 독일 분데스리가로 진출해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서 4시즌, 바이어 레버쿠젠에서 6시즌을 뛰면서 정규리그에서만 98골(컵대회 등 포함하면 121골)을 터뜨렸습니다.

이 기록은 10년간 역대 외국인 선수 최다골 기록이기도 했죠(1998년 스위스 출신인 스테판 샤퓌자가 차범근 감독의 기록을 깼습니다).

차범근의 최고 시즌을 꼽자면 프랑크푸르트 소속이었던 1979-80시즌과 레버쿠젠 유니폼을 입은 1985-86시즌을 들 수 있습니다.

독일을 대표하는 축구 매체 키커지가 선정한 ‘시즌 베스트 11′에 뽑힌 두 시즌이기도 합니다.

스탯만 비교하면 19골을 넣은 1985-86시즌이 15골을 터뜨린 1979-80시즌보다 더 낫습니다. 차범근은 1985-86시즌에 정규리그인 분데스리가에서만 17골을 넣었습니다.

이는 지난 시즌 손흥민이 프리미어리그에서 17골을 터뜨리며 타이기록을 세울 때까지 35년간 유럽 정규리그 한국인 최다 골 기록이었죠(올해 손흥민은 21골로 차범근을 훌쩍 넘어섰습니다).

따지고 보면 차범근이 실제 분데스리가에서 뛴 첫 시즌은 1978-79시즌이었습니다.

그는 25세이던 1978년 12월 다름슈타트 유니폼을 입고 리그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하지만 1979년 1월 전역할 것이라 보고 특별 휴가를 받아 다름슈타트와 계약한 그에게 군 당국은 그해 5월까지 복무 기간을 다 채우라고 했죠. 1976년 10월 차범근이 공군에 입대할 당시 팀 전력 강화를 위해 제대를 앞당겨준다고 했던 입장을 군이 돌연 바꾼 겁니다.

우여곡절 끝에 군 복무를 다 마친 차범근은 다시 독일로 건너가 1979년 7월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합니다.

1979-80시즌이 사실상 첫 시즌인 이유죠. 병역 문제로 공군에 돌아가서 5개월 동안 실전에 나서지 못했던 26세 선수가 분데스리가에 진출하자마자 시즌 베스트11을 꿰찼으니 센세이션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1979-80시즌과 1985-86시즌을 다시 비교해 본다면, 평점 평균에서 1979-80시즌(2.45)이 1985-86시즌(3.18)보다 앞섭니다. 1점이 최고점인 분데스리가 평점은 숫자가 작을수록 좋은 평가를 나타내는데 2.45는 분데스리가 전체 공격수 중 세 번째로 좋은 평점이었습니다.

또한 주간 베스트11에도 8회나 뽑혔습니다(1985-86시즌은 6회).

더욱 결정적으로 1979-80시즌 차범근의 프랑크푸르트는 팀 창단 후 처음으로 UEFA컵 정상에 오릅니다. 차범근도 이 대회에서 3골을 넣으며 팀 우승에 기여합니다. 여러모로 완벽한 데뷔 시즌이자 역사에 남을 시즌이 됐습니다.

IMF 외환위기에 허덕이는 한국 국민들에게 희망을 준 '코리안 특급' 박찬호. / 조선일보DB

◇ 박찬호의 2000시즌

1997년 11월 외환 보유액이 급감하자 한국 정부는 IMF(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요청했습니다. 많은 국민이 고통 받았던 ‘IMF 시대’에 영웅이 나타났죠. 메이저리거 박찬호였습니다.

‘코리안 특급’이라 불리던 박찬호는 LA 다저스에서 1997시즌 14승 8패, 1998시즌 15승9패, 1999시즌 13승11패로 맹활약합니다.

한국 야구 선수가 ‘꿈의 무대’인 메이저리그에서 정상급 선발 투수로 자리매김한다는 것은 이전엔 상상도 하기 어려웠던 일이라 국민들은 열광합니다. 박찬호가 등판하는 날이면 온 국민의 관심이 그가 뛰는 미국의 한 야구장으로 쏟아졌습니다.

그런 그의 커리어 하이 시즌은 2000년입니다.

박찬호는 2000시즌 개인 최다승인 18승(10패)을 올렸고, 평균자책점도 커리어에서 가장 낮은 3.27를 기록했습니다.

당시 메이저리그가 약물로 근육을 키운 파워 히터가 넘쳐나던 ‘타고투저’의 시대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기록입니다(2010년대 들어 메이저리그엔 약물 파동이 터지면서 박찬호 시절 활약했던 많은 타자들의 약물 이력이 탄로 나고 맙니다).

다시 2000년으로 돌아가 박찬호의 위력을 설명하자면 이 데이터가 좋을 것 같습니다. 박찬호는 그해 9이닝당 피안타가 6.9였는데 이는 내셔널리그 1위 기록이었습니다. 볼넷을 많이 허용하는 스타일이긴 했지만, 구위가 워낙 좋아 타자가 박찬호의 공을 쳐서 안타를 만들기는 정말 어려웠던 겁니다.

박찬호는 2000년 8월 24일 몬트리올 엑스포스전에서 3회말 하비에르 바스케스의 초구를 두들겨 메이저리그 입성 후 첫 홈런을 기록합니다. 그날 7이닝 무실점으로 통산 60승째를 올리죠.

시즌 마지막 등판이었던 9월 29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전에서는 9이닝 2피안타 무실점으로 데뷔 첫 완봉승을 거둡니다. 8회엔 시즌 2호 홈런도 쏘아 올렸죠.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시즌 피날레였습니다.

박찬호는 2002시즌을 앞두고 당시 환율로는 900억원이 넘는 5년 7100만달러(옵션 포함)에 텍사스 레인저스 유니폼을 입습니다. 하지만 부상과 부진이 겹치며 다시는 전성기의 모습을 재현하지 못했죠.

그렇지만 많은 국민에게 희망을 선사한 ‘코리안 특급’의 2000시즌은 특별한 시간이었습니다.

2010-11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에서 첼시를 상대로 결승골을 터뜨린 박지성. 그는 큰 경기에 강한 사나이였다. / 조선일보DB

◇ 박지성의 2010-11시즌

잉글랜드의 명문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요즘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20회로 잉글랜드 1부 리그 최다 우승 기록을 가진 맨유는 2012-13시즌을 끝으로 정상에 서지 못했습니다.

올 시즌엔 맨유 전성기를 이끈 수퍼스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까지 영입했지만, 6위에 처져 있습니다. 왕년의 맨유를 생각하면 정말 낯선 순위입니다.

맨유가 프리미어리그 3연패(連覇)를 이룬 황금 시절이 있었습니다.

2006-07시즌부터 2008-09시즌까지 3년 연속 우승 트로피를 들었습니다. 2010-11시즌과 2012-13시즌에도 리그 우승을 거머쥐었죠. 이 모든 우승에 함께한 이가 박지성입니다.

2005-06시즌을 앞두고 맨유에 입단한 박지성은 ‘레드 데블스(맨유의 별명)’의 일원으로 7시즌을 뛰며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골로 말하는 스트라이커 차범근·손흥민과 달리 박지성은 미드필더로 수비적인 임무를 함께 소화하며 맨유의 공·수 밸런스를 잡아주는 역할을 훌륭히 해냈습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언성 히어로(Unsung Hero·소리 없는 영웅)’였습니다.

박지성이 맨유에서 보낸 7시즌 중 최고를 꼽는다면 2010-11시즌이 아닐까 합니다. 2010 남아공월드컵에서 한국의 원정 첫 16강을 ‘하드 캐리’했던 그는 소속팀에 돌아와서도 활약을 이어갑니다.

국내 축구 팬이라면 모두 기억하는 울버햄프턴전이 이 시즌입니다.

2010년 11월 그는 전반 종료 직전, 그리고 후반 인저리 타임에 각각 골을 터뜨리며 팀의 극적인 2대1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11월과 12월, 절정의 기량을 보이며 두 달 연속 맨유의 이달의 선수에 뽑힙니다.

2011년 4월엔 첼시와 UEFA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에서 결승골을 터뜨리며 팀에 4강을 선사했습니다. 후반 32분 첼시의 디디에 드록바가 1-1 동점을 만들자마자 박지성이 왼발 강슛으로 골망을 가르면서 첼시의 희망을 꺾어버렸죠.

5월엔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사실상 결정짓는 첼시와 36라운드 경기에서 치차리토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종횡무진 그라운드를 누볐습니다. 상대 미드필더인 마이클 에시엔이 박지성에게 “제발 좀 그만 뛰어라”고 할 정도였죠. 그해 박지성은 맨유 프리미어리그 우승의 확실한 주역이었습니다.

환상적인 시즌을 보낸 박지성은 2009년에 이어 두 번째로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 무대에 섭니다. 제가 바로 웸블리에서 직관한 그 경기인데요. 안타깝게도 2년 전에 이어 또 한 번 바르셀로나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피날레는 아쉬웠지만, 그래도 찬란히 빛나는 한 시즌이었습니다.

김연경은 페네르바체에서 뛰며 세계 최고 클럽이 경합한 CEV 챔피언스리그에서 MVP와 득점왕을 거머쥐었다. / 조선일보DB

◇ 김연경의 2011-12시즌

‘배구 여제’ 김연경은 2010-11시즌 일본 JT 마블러스 유니폼을 입고 창단 후 첫 우승을 이끌며 MVP와 득점왕을 석권합니다.

그리고 다음 시즌 당시 세계 최고로 꼽히던 터키 리그로 향하죠. 몇 년 전만 해도 이탈리아·스페인에 밀려 B급으로 평가받았던 터키 리그는 2008년부터 시작된 유럽 금융 위기로 다른 리그가 주춤한 사이 세계적인 선수들을 앞다퉈 영입하며 수준을 끌어올렸습니다.

김연경의 소속팀인 페네르바체는 엄청나게 화려한 라인업으로 국내 팬들로부터 ‘지구방위대(원래는 스페인 프로축구 레알 마드리드의 호화 라인업을 일컫는 말)’란 별명으로 불리던 팀이었습니다.

2008 올림픽 득점왕인 레전드 올어라운드 플레이어 로건 톰(미국), 2000·2004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인 ‘배구 여왕’ 류보프 소콜로바(러시아), 2008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낸 세계적인 미들 블로커 파비아나 클라우디누(브라질), 향후 페네르바체의 전설이 되는 에다 에르뎀(터키) 등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특히 레프트 포지션에서 톰과 소콜로바가 있는 상황에서 김연경에게 기회가 돌아갈까 우려가 있었지만, 김연경은 보란 듯 터키 리그 첫 시즌부터 에이스로 우뚝 서며 팀 공격을 이끌었습니다.

김연경은 유럽 각국 여자 배구리그의 정규리그 1위 팀이 출전하는 최고 권위 대회인 CEV 챔피언스리그에서 맹활약하며 페네르바체에 첫 우승을 선사했습니다.

결승전에서 프랑스 RC칸을 상대로 23점을 퍼부으며 3대0 완승을 이끌었죠. 대회 MVP와 득점왕을 석권하며 세계적인 선수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는 2011-12 챔피언스리그에서 12경기 40세트를 통틀어 총 228득점(경기당 평균 19점)을 올리는 가공할 공격력을 과시했습니다.

세계 여자 배구의 ‘메시’가 된 김연경은 그 시즌이 끝나고 런던올림픽에 출전합니다.

결과는 모두 알다시피 8경기에서 올림픽 신기록인 207점을 터뜨리며 한국을 4강으로 이끌었죠. 4위 팀 선수였음에도 올림픽 MVP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기념비적인 한 시즌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신시내티 레즈 시절의 추신수는 출루율의 화신이었다. / 조선일보DB

◇ 추신수의 2013시즌

올해 한국 프로야구 SSG 랜더스에서 두번째 시즌을 맞이한 추신수는 역대 최고 한국인 타자로 꼽히는 스타입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신시내티 레즈, 텍사스 레인저스 등을 거치며 메이저리그에서만 16년을 뛰었습니다. 통산 타율 0.275, 1671안타 782타점을 올린 그는 ‘호타준족’으로 이름을 날리며 20-20 클럽에도 세 차례 이름을 올렸습니다.

추신수를 가장 돋보이게 한 것은 ‘눈 야구’입니다. 메이저리그 통산 출루율이 0.377에 달했습니다. 현대 야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데이터 중 하나인 출루율에서 두각을 보이면서 그는 천문학적인 연봉의 주인공이 됩니다.

신시내티 레즈에서 뛴 2013년은 추신수가 출루율 0.423에 달한 시즌입니다.

타율이 3할(0.285)에 못 미친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기록이죠. 팀 동료인 조이 보토(0.435)에 이어 내셔널리그 출루율 2위에 올랐습니다. 그해 21홈런 20도루로 개인 통산 세 번째 20-20 클럽에 가입했고, 팀이 와일드카드 2위를 차지하며 처음으로 ‘가을 야구’ 무대에도 나섭니다.

야구의 많은 데이터 중 fWAR란 수치가 있습니다. WAR(Wins Above Replacement)은 대체 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를 말하는데 일반적인 보통 선수, 즉 대체 수준의 선수와 비교해 해당 선수가 얼마나 팀 승리에 기여 한지를 나타내는 데이터입니다.

종합적인 활약을 평가해 선수의 가치를 구하는 데이터인만큼 계산 방식이 까다롭고 복잡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WAR로는 팬그래프가 추산하는 fWAR, 베이스볼레퍼런스가 구하는 bWAR이 있습니다.

추신수의 2013시즌 fWAR은 6.4입니다. 보통 선수와 비교해 팀에 6.4승을 더 안겼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동양인 메이저리거 타자 기준으로는 2004시즌 스즈키 이치로(7.1)에 이어 역대 두 번째 기록입니다. 46홈런을 때린 오타니 쇼헤이의 지난 시즌 fWAR이 5.1(타자 기준, 투수로는 3.0을 기록)인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대단한 수치인지 알 수 있죠.

2013시즌 활약은 큰돈을 불렀습니다. 추신수는 2014시즌을 앞두고 텍사스 레인저스와 역대 아시아 선수 최고액인 7년간 1억3000만달러(당시 환율 1380억원)에 계약하며 ‘아메리칸 드림’에 정점을 찍었습니다.

류현진은 재기가 어렵다는 어깨 수술을 받고도 사이영상 투표에서 내셔널리그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조선일보DB

◇ 류현진의 2019시즌

대학 졸업 후 곧바로 미국 무대에 뛰어든 박찬호와 달리 류현진은 KBO리그에서 성장해 메이저리그에서 꽃을 피운 투수입니다.

2006년 한화 이글스에 입단해 18승 6패, 평균자책점 2.23, 탈삼진 204개를 기록하며 투수 트리플 크라운(다승·탈삼진·평균자책점 1위)을 달성합니다. 워낙 ‘괴물’ 같은 활약을 펼친 덕분에 리그 최초로 MVP와 신인왕을 석권했죠.

한화에서 7시즌을 뛰며 98승52패를 기록한 류현진은 2013시즌을 앞두고 LA 다저스에 입단합니다. 한국 프로야구 선수로 메이저리그에 직행한 첫 선수가 된 것입니다.

2013·2014시즌 각각 14승을 수확하며 빅리그에 안착한 류현진은 부상이란 암초를 만납니다. 재기가 불투명한 어깨 수술을 받고 재활에만 2년 이상 매달렸습니다. 2018시즌에도 다리 근육 부상으로 100일간 뛰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2019시즌이 가장 아름다운 한 해가 됐습니다. 5월엔 5승 무패, 평균자책점 0.59로 내셔널리그 ‘이달의 투수’가 됐고, 7월 올스타전엔 내셔널리그 선발 투수로 나와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습니다.

12승을 기록한 뒤 8월 18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전부터 4경기 내리 난타를 당하면서 위기를 맞았지만, 마지막 세 차례 등판에서 21이닝 3실점으로 구위를 회복하며 성공적인 한 시즌을 마무리했습니다.

류현진의 2019시즌 기록은 14승5패, 평균자책점 2.32. 아시아 선수 최초로 메이저리그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거머쥐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한 해 최고 투수를 가리는 사이영상 투표에선 내셔널리그 2위를 차지했습니다.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그는 아시아 투수로는 처음으로 사이영상 1위 표를 얻는 성과도 남겼죠.

1위 표 1장과 2위 표 10장, 3위 표 8장 등 88점을 받아 2013년 2위(93점)를 차지한 일본의 다르빗슈 유(당시 텍사스 레인저스)에 이어 총점이 두 번째로 높았습니다. 어깨 수술을 이겨낸 류현진의 뚝심이 돋보인 시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