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차량 조달 시장이 품질과 기술력이 아닌 최저가에 기반한 가격 경쟁을 하고 있어 문제가 지적되고 있다. 사진은 KTX-이음 철도차량. / 현대로템 제공

최근 중대재해처벌법 본격 시행으로 기업의 안전과 기술, 사회적 책임이 산업계의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대규모 시민을 수송하는 철도 부문 역시 안전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철도는 열차 탈선이나 사고, 고장 등 문제가 발생하면 노선 지연으로 인한 시민들의 큰 불편을 야기한다. 최악의 경우 대형 인명피해로도 번질 수 있어 각별한 관심이 필요한 교통수단이다.

전문가들은 해외 철도선진국처럼 철도차량 조달시장 전반에 기술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종합심사낙찰제도’가 자리잡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현재 철도차량 조달 시장은 시민 안전을 담보할 품질과 기술력이 아닌 최저가에 기반한 가격 경쟁을 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정부가 유일한 발주처인 국내 철도차량 조달 시장은 ‘2단계 규격ㆍ가격분리 동시 입찰제’를 시행하고 있다. 이 입찰제는 1단계 기술 평가에서 최저 점수만 넘기면 되는 ‘Pass or Fail’ 방식으로 진행되고, 2단계에서는 최저가를 써낸 업체를 최종 낙찰자로 선정한다.

기술력과 안전성, 적기 납품에 대한 신뢰성이 부족하더라도 누구나 최저가를 적어내면 공급업체가 될 수 있는 방식이다. 이에 따라 국내 철도차량 제조업체 3사(다원시스, 우진산전, 현대로템)는 저가 수주와 수익성 악화에 내몰리며 치킨게임(상대가 무너질 때까지 출혈 경쟁을 하는 것)을 이어가고 있다. 자연스레 열차 품질은 하향평준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난 5월 개통한 서울 신림선의 잦은 고장과 지난 11월 발생한 무궁화호 탈선 사고 등 최근에도 열차 사고가 잇따르고 있지만 잠재 사고 발생 위험이 높은 노후화된 열차 교체는 선제적으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통안전공단에 따르면 올해 2분기 기준 국내 철도차량 2만2179량 중에서 운행 기간이 20년 이상인 철도차량은 총 1만1739량(52.9%)으로 절반 이상이 철도차량 수명을 넘기거나 기대수명(통상 25년)에 도달했다.

이처럼 철도차량 노후화가 심각한 수준이지만 신차 납기 지연 문제로 차량 교체 시기도 늦어지고 있다. 최저가 입찰제 하에서 새로 시장에 진입한 중견 업체들이 기술 평가를 제대로 받지 않은 채 생산 능력을 벗어나는 무리한 저가 수주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올해 11월 기준 우진산전이 낙찰받은 2·3호선 전동차 196량 사업은 납품이 최대 677일까지 지연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원시스가 납품할 5·7호선 전동차 336량 사업 역시 최대 434일 지연되고 있다.

지난 2021년 4월 부산 1호선 전동차 200량 교체 사업 입찰 평가에서는 최저가 입찰제의 맹점이 단적으로 드러났다. 당시 입찰에 참여한 국내 3개 제조업체는 1단계 기술평가에서 최소 기준인 85점을 모두 통과했지만 2단계에서 최저가를 적어낸 우진산전이 최종 낙찰자로 선정됐다. 사업 이행 실적이 3사 가운데 최하였던 우진산전이 낮은 응찰가를 앞세워 수주에 성공한 것이다.

최저가 입찰제 도입으로 우진산전은 최근 3년간 국내 전동차 시장에서 총 1조1945억원(53%)의 수주를 가져갔다. 다원시스가 7317억원(32%)으로 뒤를 이었고, 현대로템이 3412억원(15%)으로 가장 저조한 성적을 올렸다. 최근 4년(2018년~2021년) 기준으로 보면 철도차량 업계에서 우위에 있던 현대로템이 뒤로 밀려났고, 철도 부문 영업 누적 적자는 2391억원으로 나타났다.

저마다 출혈 경쟁이 격화하는 환경 속에서 국내 철도차량의 최종 낙찰단가는 해외 평균 수준에도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다. 최근 3년(2020~2022년) 국내에서 경쟁 입찰로 수주가 이뤄진 사업을 보면 1량 당 평균가는 11억7500만원이다. 반면 최근 3년 해외에서 발주된 전동차 사업의 1량 당 단가는 약 30억원 수준이다.

고속차량 시장도 가격현실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지난 2016년에 코레일이 발주한 동력분산식 고속차량 EMU-320은 1량 당 33억원에 최종 낙찰됐다. 이는 해외 고속차량 가격이 1량 당 약 50억~70억원 수준인 것을 고려하면 절반 수준이다. 한국이 국제 경쟁 입찰 시장임에도 해외 고속철 제작사가 그간 국내 입찰에 소극적이었던 이유다.

최근 스페인 고속열차 제작사 탈고(TALGO)가 우진산전과 컨소시엄을 꾸려 코레일의 고속철 발주 사업에 뛰어들게 된 것도 최저가 입찰제의 허점을 노린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여기에 2027년부터 KTX-Ⅰ 노후화에 따른 교체 물량(900여 량)이 순차적으로 발주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철도차량산업의 점유율이 떨어지면 기술력 퇴화를 부르게 되고, 내수는 물론 수출 경쟁력마저 떨어뜨릴 가능성이 높아 국내 산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더욱 커지고 있다. 저가 응찰을 하게 되면서 국내 업체들이 경쟁적으로 저품질의 중국산 부품 사용을 늘리는 점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유럽의 경우 시행사가 발주를 하면 입찰 초청서를 발송한 업체들만 입찰 참여가 가능하다. 여기에 자체 규격 규정인 TSI(Technical Specifications for Interoperability)라는 규제 장벽으로 비유럽 국가의 진입을 사실상 원천 차단해 유럽 철도차량 산업을 보호하고 있다. 전세계 철도차량 시장 점유율 1위인 중국 의 경우 철도차량 입찰 참여 시 자국법인과의 공동 응찰을 의무화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해외 철도선진국처럼 철도차량 조달시장 전반에 기술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종합심사낙찰제도’가 자리잡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 대만, 싱가포르 등 해외 대부분 국가에서는 국내와 달리 지하철 교체사업 추진 시 기술과 가격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업체를 선정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총 배점 비율을 가격 30% 및 기술 70%로, 대만은 가격 20% 및 기술 80%로 각각 설정해 업체의 종합적인 능력을 평가하고 있다. 이집트에서도 기술평가 70점, 가격을 30점으로 배정하고 있다. 국내처럼 오직 가격만을 따져 최종 공급자를 선정하는 방식은 글로벌 스탠다드와 동떨어진 방식이라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