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카드는 이제 데이터 사이언스 기업입니다."

정태영(60) 현대카드 부회장이 수수료·이자 수입 중심의 기존 수익 모델을 벗어나, 카드사가 가진 데이터를 가공·활용해 수익을 내는 데이터 기업으로의 체질 전환을 선언했다. 세계적인 팝스타들을 초대한 '수퍼 콘서트', 봉평장 등 전통시장 활성화 프로젝트, 최고급 블랙카드 출시 등 파격적인 실험을 하며 금융계 혁신의 아이콘으로 불리던 정 부회장이 새로운 도전을 선언한 것이다. 수년간 내부 수술에 집중해온 정 부회장은 "데이터 사업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았다"고 했다. 그는 "보석 같은 데이터만을 따진다면 네이버나 카카오가 아닌 카드사에 가장 많이 있을 것"이라며 새 비즈니스에 자신감을 보였다.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이 지난 5일 서울 여의도 현대카드 본사에서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데이터 플랫폼 사업 전략을 소개하고 있다.

◇일류 기업들과 제휴한 '데이터 동맹'

정 부회장은 최근 본지 인터뷰에서 현대카드가 자체 데이터 기술로 개발해 6월부터 가동한 '데이터 플랫폼'인 '트루 노스(true north)'를 처음 공개했다. 트루 노스는 마케팅 효과가 높을 것으로 예상되는 고객을 선별해 쿠폰 등 프로모션을 발송하는 시스템이다. 가령 어떤 기업이 '매장이 한가한 월요일 오후 2시 이후에 방문할 수 있는 고객만을 대상으로 할인 쿠폰을 제공하고 싶다'거나 '폐업한 근처 대형 마트를 이용하던 고객들을 대상으로 프로모션을 하고 싶다'고 요청하면, 트루 노스에서 조건에 적합한 현대카드 고객을 추려 '오후 2~6시 방문 시 10% 할인' 같은 쿠폰을 보내주는 식이다. 실제로 한 제휴 업체는 트루 노스를 이용하면서부터 고객이 쿠폰을 이용하는 비율이 지점별로 3~4배씩 높아진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정 부회장은 "과거에는 성별·나이 같은 기준으로 고객을 분류했다면, 트루 노스는 개인의 소비 행태 분석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훨씬 적중률 높은 자료를 제휴사에 제공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현대카드는 PLCC(상업자 표시 신용카드) 사업에 접목해 트루 노스의 전략적 가치를 극대화하려 한다. PLCC란 유통 업체 등 카드사가 아닌 기업이 카드사에 위탁해 자체 신용카드를 출시하는 것으로, 국내 PLCC 분야에선 현대카드가 독보적이다. 현대카드는 현대차·기아차·이마트·이베이에 더해 작년 코스트코·SSG.COM·GS칼텍스를 PLCC 제휴 기업 목록에 추가했고, 올해 들어서도 대한항공·스타벅스·배달의민족·쏘카와 손을 잡아 기업 총 11곳과 PLCC 제휴를 맺고 있다. 현대카드가 트루 노스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 바로 이 PLCC 제휴 기업들이다. 제휴사용 버전인 '파트너 노스'를 각 기업에 제공해 비즈니스에 응용토록 하고 있다. 향후에는 이 플랫폼을 통해 고객 정보 교환 없이, 현대카드 고객뿐 아니라 제휴사들끼리 서로의 고객을 대상으로 마케팅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정 부회장은 "제휴사 모두가 각 분야의 '챔피언 기업'이며 이들끼리 데이터 동맹을 구축하려 한다"며 "각 제휴사를 '행성'에 비유해 데이터 동맹에 '도메인 갤럭시(Domain Galaxy)'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그동안 카드 업계에선 "잘나가는 PLCC 제휴사를 끌어들이기 위해 비용을 많이 들여봐야 남는 것이 없을 것"이란 말이 나왔다. 이에 대해 정 부회장은 "현대카드만의 트루 노스라는 데이터 설루션을 제시했기 때문에 기업들이 이를 보고 선택한 것이지, 돈으로 이긴 게임은 없었다"고 말했다.

◇가장 많은 사진 데이터 가진 코닥은 필름 팔 생각만 하다 파산

실제로 정 부회장의 전략은 먹혀들고 있다. PLCC는 각 기업이 하나의 카드사와만 출시하기 때문에, 해당 기업의 충성 고객이 카드사로 유입되는 효과가 난다. 모집 비용을 쓰지 않고도 고객 수를 늘릴 수 있는 것이다. PLCC 사업을 시작하기 전인 2016년과 올해 6월 말을 비교해 현대카드는 고객 수가 679만명에서 892만명으로 꾸준히 증가했고, 고객 한 명당 평균 모집 비용은 18만2000원에서 3만1000원으로 확 줄었다. 올해 상반기(1662억원)에만 작년 한 해(1676억원)에 맞먹는 당기순이익을 올렸다. 반기 기준으로 현대카드 역대 최대 실적이다.

정 부회장은 "이런 사업 모델은 어디에도 없고 현대카드가 유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또다시 찾아나선 걸까. 정 부회장은 필름 제조사인 코닥과 사진 공유 소셜미디어인 인스타그램 사례를 들었다. 정 부회장은 "코닥은 2012년 파산 신청을 할 때까지 오로지 '필름을 어떻게 팔까'만을 고민했지만, 사실 가장 많은 사진 데이터를 가지고 있던 기업"이라며 "코닥은 필름 파는 것만 생각하다 인스타그램 같은 새로운 발상에 실패했다"고 했다. 이어 "카드업 역시 카드 가맹점 수수료 인하로 수익성이 떨어지고, 시장이 이미 커질 대로 커져 신규 모객도 그저께 뺏긴 고객을 찾아오는 수준이라 의미가 없어졌다"며 "기존 방식을 고수했다간 미래가 없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업(業)을 어떻게 할 것인지 다르게 보는 틀이 중요하다"고 했다. 정 부회장은 "카드사를 비롯해 대부분 기업엔 충분한 데이터가 쌓여있지만, 이를 유의미하게 쓸 수 있도록 분류해 정제된 데이터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라면서 "이 노력 없이는 데이터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고, 디지털 체질 변화도 어렵다"고 강조했다.

데이터 사업이 수익원으로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묻는 질문에 정 부회장은 “그건 모른다고 말하는 게 맞는다”고 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하고 있을 때 기회도 오고 새로운 상상력도 오는 것이라고 했다. 정 부회장은 “앞으로 현대카드의 라이벌이 카드사일지, 빅테크일지, 전혀 다른 산업이 될지 알 수 없다”며 “다만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보석’ 같은 데이터만 따진다면 보석이 가장 많은 건 네이버·카카오가 아니라 카드사일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