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오전(현지 시각) 미국 뉴욕시 퀸스에 있는 회원제 할인 매장 코스트코. 매장 한편의 약국에 '독감 예방주사(Flu Shots) 접종 시작'이란 안내 문구가 붙었다. 15분쯤 줄 서 기다리니 차례가 돌아왔다.

약사에게 "예약 없이 왔는데 바로 맞을 수 있냐"고 했더니 "요즘 대기 줄이 길어 오래 기다려야 하는데 당신은 운이 좋다"고 했다. 먼저 체온을 재 열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복용 중인 약물이나 백신 이상 반응 경험 등을 묻는 간단한 설문지를 작성한 뒤 주사를 맞았다.

네 종류 독감을 예방할 수 있는 4가(四價·quadrivalent) 백신 가격은 세금 없이 19.99달러(약 2만3800원). 한국의 절반 정도 수준이다. 또 한국과 달리 미국의 독감 백신은 웬만한 건강보험으로 커버된다고 했다.

통상 10~11월에 맞는 독감 백신이 미국에 8월부터 시장에 풀린 것은 다름 아닌 코로나 때문이다. 코로나가 잦아들지 않는 가운데 가을·겨울 독감(Influenza) 유행철이 다가오면서 '트윈데믹(twindemic·두 팬데믹이 동시에 오는 것)' 공포가 덮친 것이다. 아직 백신도 치료제도 없는 코로나는 막을 길이 없지만, 독감은 백신이 있으니 최대한 막아보자는 것이다.

19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의 한 약국 앞에 걸려 있는 독감 접종 알림판.

트윈데믹 공포는 정확히 말해 '코로나로 과부하가 걸린 의료 시스템에 독감 창궐이란 이중 악재가 덮치면 의료 붕괴 사태가 올 수 있다'는 것이다. 독감과 코로나는 전혀 다른 바이러스다. 그러나 독감도 미국에서 매년 2만~6만명을 사망케 하는 무서운 전염병이다. 또 코로나와 독감 둘 다 비말로 전염되는 중증 호흡기 질환이고, 고열·두통·기침 등 증상이 비슷해 구별하기 쉽지 않다.

또 독감 환자도 심하면 대형 병원 집중치료실(ICU)에서 산소호흡기 치료 등을 받아야 하는데, 코로나 환자가 들어찬 병원에서 독감 환자는 처리 불능 사태에 처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뉴욕은 이미 이런 의료 붕괴를 처절히 경험했다. 지난 3~4월 코로나가 강타한 뉴욕에선 코로나 진단조차 제때 할 역량이 안 돼 "40도 이상 고열과 청색증(산소 부족으로 입술 등 점막이 파랗게 변하는 것)이 없으면 병원에 오지도 말라"고 했고, 코로나 사망자를 담은 시신 가방들이 병원 영안실 밖 도로에 나뒹굴기도 했다.

한 사람이 독감과 코로나에 동시에 걸릴 가능성도 문제다. 텍사스 휴스턴 베일러 의대의 플로 커누즈 교수는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코로나에 걸려 폐에 큰 손상을 입은 사람이 독감에 걸리면 치명적일 것"이라고 했다. 로버트 레드필드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 국장은 12일 "코로나와 독감이 동시에 발생하면 병원 시스템이 많은 압박을 받을 수 있다"며 "방역 수칙을 잘 지키지 않을 경우 우리가 겪어본 최악의 가을이 될 수 있다"고 트윈데믹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실제 남반구인 호주에선 지난 6월 겨울이 시작되면서 이 '트윈데믹'을 피하려 독감 백신 접종을 적극 확대했고, 예년 2만여건이던 독감 감염 건수가 올해 85건으로 뚝 떨어졌다고 한다. 당국과 의료진이 코로나 대응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확진자 566만명에 17만명 이상이 코로나로 사망한 미국의 보건 당국은 독감 백신 접종률을 높이는 데 사활을 건다. 예년 45% 정도였던 백신 접종률을 올해 65%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다. 제약사들은 예년보다 독감 백신 생산량을 15% 늘렸다. 당국은 저소득층 보급용 백신을 평소 50만 접종분에서 올해 930만 접종분으로 대폭 확대했다.

당국은 TV·라디오·소셜미디어에서 "당신과 가족을 위해 독감 주사를 맞으라"고 대대적인 홍보를 벌이고 있다. 미 최대 공립대학인 캘리포니아대는 9월 개학을 앞두고 직원과 학생 50만여 명의 독감 백신 접종을 의무화했고, 매사추세츠주도 6개월 이상 모든 영아와 어린이, 대학생 등의 백신 접종을 의무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