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에 관심 좀 있는데 '스팩(SPAC)'이란 단어가 낯설다면, 바로 밑줄을 긋는 게 좋다. 지금 월가(街)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시장 거물들이 앞다퉈 달려드는 투자처가 스팩이다. 스팩은 '기업 인수 목적 회사'(Special Purpose Acquisition Company)의 약자로 '백지수표 회사'라고 흔히 불린다. 통상적인 기업 공개 절차는 회사가 가치를 올려 증시에 상장하고 일반 주주들이 그 주식을 사는 것이다. '스팩'은 거꾸로다. 투자자(사모펀드 등)가 아무것도 없는 '껍데기' 회사를 증시에 올려 일반 투자자에게 돈을 모으고, 그 돈으로 가치 있는 회사를 골라서 인수한다. 스팩 주식은 다른 주식처럼 증시에 상장돼 거래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14일 "올 들어 스팩은 미국 주식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자산"이라고 보도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코로나 팬데믹으로 시장이 불안정한 상황에 스팩이 폭발했다"고 전했다. 이 백지수표 회사로 몰리는 돈은 어마어마하다. 금융 정보 업체 레피니티브에 따르면 미 증시에 새로 상장된 스팩을 통해 모인 돈은 올해 7월까지 236억달러(약 28조원)다. 이미 지난 한 해 전체 규모(135억달러)의 두 배에 이른다. 신규 스팩만 50개가 넘는다.

스팩에 뛰어든 거물들의 명단도 화려하다. 억만장자 투자자 빌 애크먼 퍼싱스퀘어캐피털 회장은 지난달 40억달러(약 4조7300억원)를 공모, 스팩을 상장했다. 단독 스팩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 이 돈으로 유니콘 기업(기업 가치 10억달러 이상 스타트업)을 인수하겠다고 밝혔다. 우버·페이팔 등의 초기 투자자였던 케빈 하츠도 스팩 대열에 합류했다. 지난 18일 2억달러를 모아 뉴욕 증시에 상장했다. 그는 최근 FT 인터뷰에서 "1990년대에 벤처캐피털이 도약했다면, 이제는 스팩의 시대"라고 말했다. WSJ는 2018년 정계 은퇴를 선언한 폴 라이언 전 미 하원의장이 스팩을 설립, 공모금 3억달러 조성을 추진 중이라고 지난 21일 보도했다.

이 뜨거운 '스팩 바람'은 평생 외길만 걸어온 한 남자에게도 불었다. 빌리 빈(58). '머니볼' 신화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그는 현재 메이저리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A's) 야구운영 부문 사장이다. 선수와 스카우트, 단장 등을 거치며 주로 운동장 주변에 머물렀던 빈 사장이 지난달 스팩에 합류했다는 소식은 스팩에 대한 시장 관심이 폭발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골드만삭스 파트너 출신인 제리 카디널과 손을 잡고(공동 회장) '레드볼(RedBall)'이란 스팩을 세웠다. 공모 규모는 5억달러로, A's 구단 가치(약 11억달러) 절반에 이른다. '머니볼의 사나이'는 왜 백지수표 회사에 뛰어들었을까. Mint가 빌리 빈 사장을 19일 단독 화상 인터뷰로 만났다. 캘리포니아주(州) 집이라는 그의 뒤로 수많은 트로피가 보였다.

"지금이 스팩에 참여할 적기"

―이번엔 머니볼이 아니고 레드볼인가.

"스팩을 함께 설립한 제리와는 오랜 친구다. 그는 골드만삭스 파트너였고 지금은 '레드버드'라는 사모펀드를 운영한다. 그전부터 제리와 이런저런 벤처 기업에 대한 기획을 이야기했는데, 지금이 스팩을 시작하기에 좋은 시기라고 판단했다."

―왜 지금 스팩인가.

"스팩이 큰 인기를 얻고 있다는 점을 보면, 시장에서 먹힌다는 뜻 아니겠는가. 우리는 여기에 스포츠 분야 스팩이 많지 않다는 점을 주목했다. 스팩, 그중에서도 스포츠 스팩을 하기에 좋은 시기라고 생각했다. 그 선택이 옳은지, 아닌지는 시간이 말해줄 테지만 흥미로운 기회라는 점은 분명하다."

스팩은 '백지수표'라고 불리지만, 이렇게 모인 돈으로 아무 기업이나 사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스팩이 상장할 때 대략 어떤 회사를 사겠다는 계획을 공시 서류에 적시한다. '레드볼'은 상장 서류에 이렇게 썼다. '유럽 축구를 포함해 사업성 있는 스포츠 구단, 지식재산을 수익화할 수 있는 스포츠 기업 등.' 스팩을 통해 모인 돈을 성장 가치가 있는 스포츠 구단을 사는 데 쓸 계획이란 뜻이다. 이 주식(티커 'RBAC.U') 가격은 22일 현재 주당 약 10달러다. 이 주식을 사면, 한국에 앉아 '머니볼' 방식의 스포츠 구단 인수전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스팩이 인수에 성공하면 주식 이름은 해당 스포츠팀으로 바뀌게 된다. 빈 사장은 "월가는 잘 모르지만 좋은 스포츠 구단을 고르는 데는 내가 일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빌리 빈이 월가에 진출했다고 봐도 되는 건가.

"난 여전히 오클랜드와 함께 있다. 파트너십은 사업적 관심사가 잘 맞아서 맺은 것이며, 야구단을 운영하는 것이 나의 주 업무다. 난 월가와는 한참 먼 사람이다, 하하. 하지만 가치 있는 스포츠 구단을 골라내는 데는 큰 관심이 있다."

"스포츠와 닮은 증시, 숨겨진 가치를 찾는다"

빌리 빈의 성공 스토리는 국내 야구팬에게도 잘 알려졌다. 영화 ‘머니볼’에서 빌리 빈 역을 맡은 배우 브래드 피트.

―스팩이 성공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게 될 텐데.

"개인적으로 돈을 보고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내 경험상 '돈'이라는 변수를 제거하고 결정을 내렸을 때 더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물론 내가 틀릴 수도 있으니 모두가 그렇게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어쨌든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성장 가능성이 큰, 가치 있는 스포츠 구단을 발굴해 잘 키우는 목적이 더 크다. 주식시장과 스포츠는 통하는 게 많기도 하고."

―시장과 스포츠, 어느 부분이 닮았나.

"나는 워런 버핏(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을 존경한다. 여러 해 전 만나서 한 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내 인생의 가장 값진 경험이었다. 그의 투자 철학, 혹은 투자 명언에 '기업'을 빼고 '구단'을 넣으면 거의 정확하게 다 들어맞는다. 시장 참가자 대부분이 보지 못하는 요소를 치밀한 분석을 통해 찾아내고, 그 가치와 성장 가능성을 믿고 투자하겠다는 신념이 통한다."

빈 사장이 노리는 회사는 스포츠 구단 혹은 스포츠 미디어·데이터 기업 등이다. 전 세계 팬을 보유한 미국·유럽 스포츠 구단은 각종 마케팅을 활용해 적지 않은 수익을 올린다. 웬만한 기업만큼 돈을 번다. 다만 레드볼은 수십억달러에 이르는 미국 프로 스포츠팀이 아닌 유럽리그 중소 프로 축구팀을 노릴 가능성이 크다.

세계 투자자의 관심이 쏠린 수소 트럭 스타트업 '니콜라', 우주여행 상품을 파는 리처드 브랜슨의 '버진갤럭틱' 등은 최근 스팩을 통해 미 증시에 상장한 화제의 기업들이다. 메이저리그 스타 출신 알렉스 로드리게스와 미국 수퍼스타 제니퍼 로페즈 커플은 최근 스팩과 인수·합병을 추진 중인 건강보조제품 업체에 투자해 화제가 됐다. 스팩이 이런 회사와 인수·합병을 통해 '백지수표'에서 '알짜 수표'로 변신하는 순간 투자자의 수익률은 치솟게 된다. 물론 제대로 된 회사를 찾지 못해 본전만 간신히 건지고 말 위험도 있다.

☞스팩(SPAC)

기업 인수 목적 회사. 인수·합병(M&A)만을 위해 존재하는 '명목상 회사'로 '백지수표 회사'라고도 불린다. 주주들로부터 자금을 모아 주식 시장에 상장하고 나서 정해놓은 기한(2~3년) 내에 비상장 우량 기업을 인수·합병한다. 기한 내 합병을 못 하면 상장 폐지되고 공모금은 투자자들에게 되돌아간다. 한국엔 2009년 말에 도입됐다.

머니볼(Moneyball)

'저(低)평가된 유망한 선수'를 골라 팀 승리를 이끌어내는 빌리 빈 스타일의 과학적 구단 운영법을 가리킨다.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새 평가지표를 개발하고 통계를 활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가성비 좋은 야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