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훈의 이슈&북스] ‘제국대학의 조센징’

지금 이 나라가 김원웅 광복회장의 8·15 경축식 발언 때문에 두쪽날 지경에 처하고 말았다. 축약하면 이런 내용이다.

“이승만은 친일파와 결탁했다. 안익태는 민족반역자다. 박정희, 백선엽 등 69명은 친일 행위가 확인됐다. 현충원에서 파묘하자.”

김원웅씨는 광복회장이 되기 전부터 이번 기념사에서 한 말과 비슷한 주장을 하고 다녔다. 광복회장이 되기 전인 2018년 12월 서울 명동 향린교회에서 친북단체 ‘위인맞이 환영단’이 마련한 세미나에 조선의열단 기념사업회장이란 직함으로 참석해 이런 축사를 했다.

광복절 기념사를 하는 김원웅 광복회장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일왕에 개처럼 충성을 다하겠다고 혈서를 쓰고 독립군 토벌에 앞장선 사람이다. (그 집안에서 큰) 박근혜보다는 일제강점기 항일무장 투쟁한 독립운동가 가문에서 자란 김정은이 낫다.”

이런 말을 하는 김원웅씨는 우리 현대사를 오직 친일과 반일, 단 하나의 잣대로만 판단하는 단선적 역사관의 소유자다. 김정은의 할아버지 김일성은 독립운동 경력을 내세워 북쪽에 왕조국가를 세운 뒤 3대에 걸쳐서 주민들 고혈을 빨아먹고 있다. 경제규모는 우리의 50분의 1밖에 안 된다. 그런 나라에서 왕노릇 하는 김정은이 대한민국 대통령보다 낫다며 꼽는 이유는 단 하나, 할아버지가 했다는 항일 운동이다.

김원웅씨는 또한 틈날 때마다 북한은 친일 청산을 완벽하게 한 것처럼 말해 왔다. 반면, 우리는 해방 후 친일파가 득세했다는 식으로 비난했다. 이번 8·15 경축사에서도 "대한민국은 민족반역자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라고 주장했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북한은 각종 문서와 연설로만 친일청산 필요성을 대대적으로 선전했을 뿐, 실제로 누굴 청산했는지는 기록이 거의 없다. 심지어 재판기록조차 없다. 실상은 오히려 그 반대다.

북한의 대표적인 역사서 '조선전사'에는 김일성이 친일파를 북한 건국에 참여시키라고 지시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김일성 동지께서는 지난날 공부나 좀 하고 일제기관에 복무하였다고 하여 오랜 인테리들을 의심하거나 멀리하는 그릇된 경향을 비판하시면서(중략) 그들을 새 조국 건설의 보람찬 길로 세워 주시었다.'

또 ‘지난날 식민지 노예교육을 받고 일제기관에 복무한 데로부터 자신들에게 적지 않게 남아 있는 부르주아 사상을 뿌리뽑고(중략) 맡겨진 혁명임무를 책임적으로 수행해 나갔다’고 서술함으로써 친일파의 북한 건국 기여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일제 강점기 일본 제국대학에서 수학한 조선인들의 인생행로를 추적한 '제국대학의 조센징.' 이중 상당수가 광복후 건국 과정에도 참여했다.

김일성은 1946년 7월 31일 ‘남조선에서 인테리들을 데려올 데 대하여’라는 입장문을 발표하고 일본 제국대학 출신들을 적극적으로 초빙했다. 김일성종합대 창립을 주도한 정두현과 신건희는 각각 경성제국대와 교토제국대학 출신이다.

김원웅씨는 경축사에서 드골 프랑스 대통령을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꼽았다. 그러나 드골이 2차 대전 당시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독일에 협력한 부역자들을 사면한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2차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4년간 점령당했다. 전쟁이 끝난 뒤 프랑스에선 대대적인 부역자 청산 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처벌 대상 선정과 처벌 수위가 공정하지 않았고 형평성도 잃었다. 이로 인해 국론 분열이 극에 달하자 드골은 “이 모든 것을 끝내자”며 1953년 살인, 고문, 간첩행위 등 중범죄자를 제외하면 모든 부역자를 사면했다.

김원웅씨는 6.25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도 “당시 남한이 친일 세력을 청산하지 못하는 정치 사회적 상황으로 인해 북한에서 주장하는 민족해방적 성격을 우리가 완전히 부인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김원웅씨 주장대로 6·25가 민족해방전쟁이면 그 전쟁에서 북한에 맞서 싸운 대한민국 호국영령은 조국해방을 훼방놓은 민족 반역자가 된다.

김원웅씨 친일파 청산 주장이 위험한 진짜 이유는 그 주장이 필연적으로 대한민국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보다못한 12개 보훈단체가 앞으로 모든 행사에서 김원웅 광복회장을 보훈단체장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이 하는 공식행사에도 참석을 배제하겠다고 선언했다.

인하대 정종현 교수의 저서 ‘제국대학의 조센징’은 일제가 세운 동경제국대학, 경성제국대학 등에서 공부한 뒤 친일파 관료로 살았지만, 해방후 대한민국 기틀을 세우는 데 기여한 이들의 행로를 추적했다. 저자는 책 맺음말에 이렇게 썼다.

"제국대학이라는 지식 제도와 관련된 근대 한국의 경험을 도덕적인 이분법으로 모두 '악'이라 규정하고 그것을 '적출'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다. 한국 근현대의 지식과 문화, 제도는 솜씨좋은 외과의사가 좋은 세포만을 남겨두고 암 덩어리를 도려내듯 '일본적인 것' 혹은 '미국적인 것'을 발라내면 '민족적인 것'만 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러한 본질주의야말로 가장 위험한 사고일지도 모른다."('제국대학의 조센징' 2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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