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를 잡고 보니 사방이 흙벽이었다. 꼬불거리는 구리선에 매달린 스피커에서는 통기타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봤자 스무 살이 갓 넘었던 선배들이 점잖은 척하며 메뉴판을 봤다. 얼마 후 동동주가 항아리에 담겨 나왔다. 주량도 모른 채 원샷을 하다 보니 항아리 바닥이 보였다. 그 바닥을 보다 다음 날이 됐다.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선배 자취방 바닥을 굴렀다. 전통주점의 첫 기억이다.

전통주점에서 김광석 노래를 듣고 부르고 서울 신림동 거리를 걷던 동기와 선배들은 취직을 했고 외국에 유학을 가기도 했다. 그 후로 꽤 오랫동안 전통주점에 가자는 사람도, 가본 적도 없었다. 유행이 돌 듯 시대가 바뀌었다. 전통주부터 바뀌었다. 종류가 다양해지고 질도 나아졌다. '신토불이'라고 윽박지르듯 강매하지 않았다. 대신 품질로 승부를 봤다. 소비자는 그 품질에 반응하는 선순환이 벌어졌다. 전통주의 쇼룸(showroom) 격인 전통주점도 퀴퀴했던 옛 모습을 떠올리면 안 된다.

서울 인사동과 맞붙은 경운동에 있는 전통 주점‘자희향’의 홍어삼합(앞)과 김치전.

지금 서울에서 가장 핫한 술집은 전통주점인 '백곰 막걸리'이다. 서울 신사동 압구정 로데오거리 한복판에 자리한 이 집은 예약이 필수다. 날이 어두워질수록 밀려드는 사람들 면면을 보니 나이 든 이가 드물었다. 바람 소리에도 까르르 웃는 젊은 청춘들이 셀카를 찍으며 전통주를 따랐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거의 모든 전통주를 갖춘 이 집 술 메뉴판은 소책자 수준이었다. 빽빽한 글자를 읽다 지치면 종업원이 호텔 레스토랑에 온 듯 조목조목 설명을 해줬다.

음식 또한 전국 특산품을 모아놨다. '부산 달고기 소금구이'는 몸통에 달같이 동그란 점이 있는 달고기를 구워낸다. 한국에서 잡고기 취급을 받아왔지만 외국에서는 고급 생선으로 대접받는 생선이다. 맛이 담백하여 여느 술을 만나도 맛이 어긋나지 않는다. 돈을 따로 받는 이 집의 '순천 김치'는 산미가 독특하여 발효주와 결이 맞았다. 특히 탄산이 섞인 막걸리를 만나니 서로 힘겨루기를 하듯 맛에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강을 넘어 상암동에는 '차림'이라는 집이 있다. 오밀조밀하고 세심한 맛이 나는 이곳은 술보다는 음식에 좀 더 무게가 실렸다. 골뱅이무침 하나만 봐도 주인장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 돌돌 곱게 말린 소면은 앙증맞게 옆을 지켰고 채소들은 꼼꼼히 썰어 골뱅이 위에 쌓았다. 이 집에 오는 사람 모두가 시키는 코다리갈비를 보면 참 고생스럽게 장사한다 싶다. 코다리의 잔가시를 핀셋으로 모두 뽑고 바삭하게 구워낸 기술과 정성에 '음식이란 참 어렵다'고 속으로 생각하게 된다. 경상도식으로 부친 '방아전'은 간간이 씹히는 청양고추의 아린 맛에 축 처진 입맛이 확확 돌아왔다. 어릴 적 동네 친구 할머니가 부쳐주던 맛이었다. 이런 개성 있는 음식들에는 향과 맛으로 밀리지 않는 증류주를 붙여줬다. 밉지 않은 고집, 그 흔치 않은 마음이 술의 향기와 같았다.

인사동 어귀 경운동으로 발길을 옮기면 좁은 골목 사이에 '자희향'이 있다. 비가 거칠게 내리는 저녁, 온몸을 젖어가며 인사동을 헤매다 이 집 앞에 섰을 때 휴대폰 지도를 다시 봤다. 술 파는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규모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에 들어서니 오히려 아늑한 기분이 들었다. 낮은 천장을 한 2층에서 주문을 넣었다. 먼저 나온 홍어삼합은 숙성으로 찌를 듯한 향이 코를 관통했지만 불쾌한 잡내가 없었다. 오히려 맑고 경쾌한 기운까지 서려 물리지 않았다. 묵은지도 홍어 맛에 물러서지 않았다. 잊고 살았던, 쉽게 만나기 어려운 오래된 맛이 이 집 김치에 있었다. 김치전도 그 맛을 품어 새콤하고 또 고소했다. 김치전은 흔한 음식이지만 또 그만큼 잘하는 집이 드물다.

이 모두를 하나로 묶는 것은 직접 담근 막걸리였다. 6도, 8도, 12도 등 도수에 따라 3종류가 있는 막걸리는 그 숫자가 올라갈 때마다 맛의 무게도 함께 더해졌다. 산뜻한 풍경에서 너르고 묵직한 심상(心象)이 상앗빛으로 반짝이는 술잔에 담겨 있었다. 기운을 어지럽히지 않고 오히려 힘을 북돋고 정신을 고양하는 것 같았다. 그 맛에 빠져 시간이 갔다. 사납던 빗소리가 조금씩 잔잔해졌다. 가득 찼던 잔이 가벼워졌다. 스무 살과 다른 삶의 무게에 움츠렸던 가슴이 다시 펴졌다. 쉽게 변하지 않고 오래 살아남은 맛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