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트럼프 정부가 이란에 대한 무기 수입 금지 조치를 연장하자는 결의안을 14일(현지 시각)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투표에 부쳤으나 15표 중 찬성표가 단 두 표만 나와 결의안이 부결됐다. 미국의 적국(敵國)이자 테러지원국에 대한 제재안을 미 동맹들조차 외면한 일은 유엔 역사상 전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미국의 굴욕"(영국 일간 가디언), "외교 참사"(미 카네기평화재단)란 말이 나왔다.

이날 미국이 낸 결의안은 '이란이 중동의 여러 테러 단체에 살상 무기를 지원해 안정을 위협한 만큼, 재래식 무기와 전투기·탱크 등을 수입하지 못하게 하자'는 내용이다. 유엔의 이란 무기 금수 조치는 2007년 발효돼 오는 10월 해제될 예정이다.

금수 조치 연장 결의안은 유엔 안보리 15국 중 최소 9국의 찬성을 얻어야 통과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미국과 미국의 점령지였던 도미니카공화국만 찬성했다. 이란과 가까운 러시아와 중국은 반대했고, 나머지 11국은 기권했다. 기권국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자 미국의 핵심 동맹인 영국·프랑스·독일이 포함됐다.

영국 등은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어차피 상임이사국인 중국과 러시아가 반대하면 부결될 것이라 기권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핑계다. 안보리 상임이사국 등은 투표 전망이 어떻든 자국의 외교적 입장을 반드시 기록한다. 미국이 지난 몇 달간 이 문제로 유럽 동맹을 끈질기게 설득했는데도 외면당한 것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동맹들의 배신에 "용서가 안 된다"며 분노했다. 미 블룸버그 통신은 "독일과 프랑스가 유엔에서 중국·러시아 편에 섰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라고 했고, 뉴욕타임스는 "미국이 국제 외교에서 얼마나 고립돼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장면"이라고 했다.

이런 일이 벌어진 건 우선 이란 무기 금수 문제가 트럼프 정부가 깨 버린 '이란 핵 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의 핵심 조항으로, 유럽 동맹들엔 '트럼프가 먼저 배신한 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바마 정부는 2015년 이란이 핵 개발을 자제하는 대신 제재를 단계적으로 완화해 5년 뒤 무기 수입도 허용한다는 합의를 했다. 당시 이 합의는 영국·프랑스·독일은 물론 러시아·중국의 동의를 얻어냈다. 그러나 트럼프는 2018년 "최악의 합의"라면서, 핵 합의에서 탈퇴해버렸다.

나머지 유럽국들과 이란은 아직 이란 핵 합의에 남아 있다. 영 가디언은 "유럽은 민주당 조 바이든 후보가 (미 대선에서) 승리할 경우 이란 핵 합의를 되살릴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동맹들은 이란 문제뿐만 아니라,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외교에 등을 돌리고 있다. 그간 트럼프 정부의 세계보건기구(WHO) 탈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탈퇴 위협 등을 당하면서 동맹 관계에 의무감을 느끼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15일 "다음 주쯤 스냅백(snapback·상대가 협정을 위반할 경우 혜택을 철회하는 장치)을 가동하겠다"고 했다. 이란이 핵 개발을 자제하겠다는 약속을 파기했으니, 무기 금수를 연장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이란 핵 합의를 탈퇴해 스냅백을 추진할 권한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