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애들은 축구 하고 여자애들은 그냥 벤치에 앉아 있는 게 체육시간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학교에 지어진 체육관이 너무나 소중해요. 지난주에 제대로 체육관에서 체육을 하고 난 뒤 진심으로 학교에 다니고 싶어졌어요." 2018년 서울 언북중학교에 다목적강당이 생긴 뒤 건물을 설계한 아이디알건축사사무소에 이 학교 3학년 여학생이 보내온 '팬레터'다. 건축가의 손길이 한 학생의 학교생활을 바꿔놓은 것이다. 최근 펴낸 '부부 건축가 생존기, 그래도 건축'에서 이 일화를 소개한 아이디알 이승환(47·사진 왼쪽전보림(46) 소장은 "도시와 삶을 바꾸는 건축 설계의 가치를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이 건물은 외벽과 천장에 투명 유리창으로 '빛의 띠'를 두르고 필요할 때만 전동 블라인드로 차광(遮光)하도록 디자인했으나, 완공 후 학교 측에선 비용을 이유로 검은 시트지를 발랐다고 한다. 책에는 이처럼 설계 의도가 존중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아쉬움을 솔직하게 적었다. 이들의 '생존기'는 조경학(이승환)과 조소(전보림)를 전공하다 건축으로 진로를 바꾼 '전과자(轉科者)' 커플이 일과 세 아이 육아를 병행하며 좌충우돌해온 이야기이기도 하다. 엄마 아빠 책상 아래 기어들어간 셋째가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눌러버리는 삽화에 그 시간이 단적으로 표현돼 있다.

개업 초기 일감이 없었던 아이디알은 공모전을 통해 울산 매곡도서관, 서울 언북중·압구정초 다목적강당 같은 공공건축 작업을 주로 해왔다. 이들은 공공건축이 '마중물'이어야 한다고 했다. "공공건축이 좋은 건축 디자인의 기준이 된다면 전체적인 건축 수준도 자연스럽게 올라갈 겁니다." 공공·민간을 막론하고 건축가와 설계에 대한 인식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이승환은 "우리나라의 주거 문화가 아파트에 편중돼 있는 이유도 있을 것"이라면서 "사람들이 자기 집 지을 기회가 별로 없다 보니 건축가도 생전 만날 일 없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