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때 서귀포의 작은 책방을 돌았습니다. 마침 2020년의 서귀포는 정부가 선정한 문화도시. 7월부터 매월 마지막 토요일을 ‘책방 데이’로 지정하고 있더군요.

반가운 얼굴을 만났습니다. 20년 전 문학을 담당하던 막내 기자였을 때의 인연. 당시 한국문학의 신선한 시도로 평가받은 출판사 작가정신의 '소설향' 시리즈를 기획했던 편집자는 서귀포 표선 마을의 책방지기가 돼 있더군요. '북살롱이마고'의 김채수 대표. 맞습니다. 올리버 색스(1933~2015)의 대표작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한국판을 펴낸 출판사 이마고의 대표였죠. 잠적이라는 명사가 어울릴 만큼 행방 오리무중이더니, 몇 년 전 이 한적한 시골에 정착했다더군요. 한때 이명(耳鳴)까지 왔었다는 그는 "팔자 도망은 해도 책 도망은 못 한다더니"라며 웃었습니다. 피할 수 없는 게 운명이라 팔자 도망 못 한다는 게 우리네 속담인데, 도대체 책서치의 책 도망은 얼마나 힘들길래 이런 비교급을 쓰는 걸까요.

김 대표 안내로 서귀포 동네 책방 9곳을 들렀습니다.

그림책카페노란우산·어떤바람·시옷서점·인터뷰·돈키호테북스·라바북스·여행가게·키라네책부엌. 새삼 확인한 사실이 있습니다. 재정적으로는 다음 달 운영을 걱정해야 할 만큼 악전고투지만, 기이할 만큼 밝고 유머 충만한 모습들. 원래 이런 유전자의 소유자가 책방을 여는 건지, 아니면 특유의 문자향이 주인의 낙천(樂天)을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시옷서점은 시집 전문 서점. 젊은 토박이 시인 부부가 운영하는데, 젊은 안주인은 구호처럼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소설은 읽고, 시는 입는다… 시·옷 서점." 넉살에도 단증이 있다면 엄지손가락 하나만으로도 9단을 땄을 것 같은 책방 주인의 언변에 넋을 잃는데, 함께 동행한 친구는 어느새 그녀와 남편이 펴낸 시집을 한 권씩 샀더군요.

키라네책부엌 주인장은 첫 직업이 서울 대치동의 특목고 전문 화학 강사였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눈에서 레이저광선이 나왔다는데, 지금은 편안한 미소가 인상적이더군요. 제주 내려와 1년 넘게 이웃 할머니들 따라 귤 따며 동네에서 인정을 받았답니다.

책 욕심에 부린 강행군이었는데, 저녁때는 신기하게도 등이 펴졌습니다.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돈도 물론 중요하지만, 스스로와의 화해와 치유가 없다면 인생은 등 펴고 살기 쉽지 않다는 걸. 책 도망에 실패한, 서귀포의 낙천주의자들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