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렌트'에서 두 배우를 보고, 기분 좋은 배신감이 들었다. 늘 소녀 같고 공주 같은 배역만 하던 그들이, 어마어마한 '또라이'로 돌변하다니!

'렌트'의 천방지축 예술가 '모린' 역에 더블 캐스팅된 배우 전나영(31)과 민경아(28)를 서울 디큐브아트센터에서 만났다. '렌트'는 에이즈 공포가 휩쓸던 1990년대 뉴욕, 재개발에 밀려 옥탑방에서 쫓겨나는 젊은 예술가들의 사랑 이야기. '모린'은 가장 자기 색깔 뚜렷하고 '똘끼' 넘치는 캐릭터다. 네덜란드에서 나고 자란 전나영은 '미스 사이공'의 주연 '킴'을 거쳐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레미제라블'의 '팡틴', 한국에서 '노트르담 드 파리'의 '에스메랄다'와 '아이다'의 '아이다'를 연기하며 각광받았다. 민경아는 조승우·박효신 등 최고 남자 배우들의 상대역으로 '웃는 남자' '지킬 앤 하이드' 등에서 여주인공을 도맡아온 배우다.

뮤지컬 ‘렌트’의 천방지축 행위예술가 ‘모린’ 역을 맡은 전나영(왼쪽)과 민경아는 무대 위에서 자유롭고 거침없었다. 두 사람은 “관객의 호응이 중요한 역할이어서, 공연마다 매번 다른 관객들 온도와 소통의 느낌에 늘 설레고 기대된다”고 했다.

그러나 둘의 모습에 이제 공주님은 없다. 철거 재개발 항의 집회에서 '모린'이 7분여 홀로 퍼포먼스를 벌이는 '오버 더 문(Over the Moon)' 장면은 '렌트'의 백미 중 백미. 여배우 혼자서 광기에 가까운 에너지를 내뿜으며 내레이션·마임·노래로 무대를 장악하고 관객의 호응을 끌어낸다. 사막의 암소가 하늘의 달을 뛰어넘는다는 이야기는 불가능을 꿈꾸는 젊은 예술가들을 상징하는 이야기여서 더 설득력 있어야 한다. 두 배우는 무대 위에서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를 내미는 파격도 마다치 않으며 자신을 내던진다. 그 뜨거움에 관객들이 '음메~'를 외치며 열광한다.

전나영은 "모린은 돈의 힘을 앞세워 청년을 밀어내는 세상을 향해 '옳지 않다'고 외치는 예술가"라고 했다. "우리도 원하는 목표를 향해 갈 자격이, 기본적 필요를 보장받을 인권이 있다고 말하는 거예요. 화나고 눈물 나는 삶들이 모인 곳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되는 거라 생각하며 연기해요." 민경아는 "지켜야 할 '선'을 넘어버리는 캐릭터라 매력적"이라고 했다. "조심스럽고, 말하기 꺼려지는 사회적 한계 따위 모린에겐 없어요. 모두를 대신해 눈치 보지 않고 용기 있게 다 얘기해 버리죠."

무대 위 ‘모린’이 될 때, 전나영(왼쪽)과 민경아 는 전혀 다른 사람인 듯 광기를 뿜어낸다.

'렌트' 팬들은 댄서 '미미'(아이비·김수하), 게이 청년 '앤젤'(김호영·김지휘)만큼이나 '모린'을 작품을 좌우하는 결정적 캐릭터로 꼽는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모린'을 노렸다. 전나영은 "팡틴, 에스메랄다처럼 죽는 역을 많이 맡아, 무대에서 수천 번도 더 죽었다. 이번엔 건강하고 자유분방한 캐릭터라 신난다"고 했다. 민경아는 "예쁜 척하는 성격이 아닌데 유독 그런 역이 많았다. 이번엔 '예쁜 척' '우아한 척' 다 벗어던졌다"며 웃었다. "친구들이 '네가 또라이인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할 때 제일 통쾌해요, 하하!"

'오버 더 문'은 두 배우가 스스로 창조해낸 장면이 많아 더 소중하다. 브로드웨이에서 온 연출가 앤디 세뇨르 주니어는 두 사람에게 3주 넘게 합창 연습만 시키다가, 어느 날 "딱 30분 줄 테니 각자 '오버 더 문' 안무를 짜오라"고 했다. '전나영 모린'이 달을 그리듯 손으로 원을 그리고 뛰어넘는 동작도, '민경아 모린'이 손가락으로 머리에 암소 뿔을 만드는 동작도 그 첫 30분에 틀이 잡혔다.

바이러스의 두려움에 짓눌린 시대, '렌트'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고 공동체를 이루는 일의 소중함에 관한 이야기라 더 소중한 작품이다. 둘은 말했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무대에 올라요. 저희 가사처럼 '오직 오늘뿐'이고, 힘든 시기를 버티는 힘 '그것은 사랑'이니까요. 큰 용기 내 극장에 와주신 관객들께,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사랑하는 이와 후회 없이 행복하게 살아갈 용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공연은 8월 23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