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사는 최모(34)씨는 31일 회사에 연차를 내고 아내와 함께 전셋집을 알아보기 위해 부동산 중개업소 수십 군데를 돌았다. 그는 "나흘 전 집주인이 새로운 세입자와 계약했다면서 연말까지 집을 빼라고 통보했다"며 "전셋집을 알아보지만 물건이 없고, 지난주 봐둔 아파트는 그새 가격이 5000만원 올랐다"며 "전셋값을 이렇게 올려도 되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전·월세 상한제와 계약갱신청구권제 등 '임대차 2법' 시행 첫날인 31일 서울 반포구 공인중개업소에 '귀한 전세' 매물 광고가 붙어 있다. 임대차법 시행으로 서울에서는 "전셋집 씨가 말랐다"는 말이 나왔다.

마포구 아현동의 R아파트에선 전용 84㎡(34평) 전세가 10억원에 나왔다. J중개업소 김모(54) 실장은 "원래 전세 시세는 8억5000만원 정도인데 최근 집주인이 호가를 크게 올렸다"며 "어제 국회에서 새 임대차법이 통과됐다는 뉴스가 나오자 다른 전세 물건도 곧바로 3000만~4000만원씩 가격이 뛰었다"고 말했다.

정부와 여당의 독주로 계약갱신청구권제와 전·월세 상한제가 시행된 첫날, 서울 전세 시장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중개업소엔 "일단 매물을 거두겠다"는 집주인의 전화가 쏟아지면서 전세 물건이 사라졌고, 남은 매물은 가격이 치솟고 있다.

◇5150가구 단지에 전세 '제로'

본지가 이날 서울의 대단지 아파트(2000가구 이상)를 조사한 결과, 전세 매물이 전체 가구 수의 0.2%에도 못 미쳤다. 서울 중구 신당동의 5150가구 규모 '남산타운'엔 전세 매물이 하나도 없었다. M공인중개소 관계자는 "단지 내 19곳 중개업소가 매물을 공유하는데, 임대차법 영향 때문인지 물건이 아예 없다"며 "단지가 크다 보니 보통 때는 전세 물건이 10건 이상, 아무리 적어도 5건은 있었다"고 말했다. 이 단지 맞은편의 2200여 가구 단지에도 전세 물건은 2건뿐이었다.

강동구 7개 단지 2만3503가구에서 나온 매물은 24건이었다. 암사동 S공인중개사사무소 박모(40) 대표는 "전셋집 구하는 문의는 많은데 보여줄 집이 없다"며 "이제는 기존 세입자가 안 나갈 수 있으니 물량은 더 줄어들 수밖에 없고, 도무지 해법이 안 보인다"고 말했다.

매물이 그나마 나오는 곳은 입주한 지 30년이 넘은 노후 아파트가 밀집한 노원구 상계동과 양천구 목동이었다. 노원구에선 상계주공아파트 중심으로 전세 물건이 111건 확인됐다. 1988~1989년 입주한 상계주공 7·10·14단지에는 각각 10건 이상씩의 매물이 있었다. 1987년 입주한 목동신시가지아파트가 있는 양천구에선 72건이 확인됐다. 공인중개사 황모(57)씨는 "목동에 재건축을 추진하는 단지가 많은데, 조합원 2년 실거주 조건이 생기면서 세입자를 내보내고 직접 입주하려는 집주인이 많다"고 말했다.

◇한 달 만에 전세금 2억 넘게 올라

매물이 귀해지면서 전셋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강남구 도곡동의 한 공인중개사는 "지난달까지만 해도 8억원대 중반이던 전용면적 59㎡ 전세가 11억원에 나왔다"고 말했다. 9510가구 단지인 송파구 '헬리오시티'는 2018년 말 입주 당시 6억원 정도이던 전용 84㎡ 전세가 10억원을 훌쩍 넘고 있다. 한 집주인은 "손해배상금을 물고서라도 연말에 지금 세입자를 내보내고 보증금을 올릴 것"이라고 말했다.

강동구 상일동 S공인중개사 사무소 고모(57) 대표는 "35년째 중개업을 하고 있는데, 이런 전세난은 처음"이라며 "물건이 없으니 당연히 가격이 뛰지 않겠느냐"고 했다. 반면, 올해 초 용산구 아파트에 전세로 들어간 강모(45)씨는 "주인이 들어오겠다고 하지 않는 한 이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돼 다행"이라며 "4년마다 집주인이 전세금을 대폭 올리지 못하게 정부가 신경을 써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