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은퇴'라는 말을 은퇴시킬 때가 됐다. 인생은 부모로부터 부양받는 시기,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시기, 부양에서 벗어나는 시기로 나뉜다. 부양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자기만의 인생을 살 수 있는 시기, 그게 곧 은퇴다. 새로운 인생 2막이 시작되는 것이다. 과거에는 이 기간이 길지 않았다. 그래서 은퇴 시기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크게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사람 수명을 가늠하기 어려운 지금은 인생 3단계 중 가장 긴 시간을 보내야 하는 시기다. '은퇴'라는 시기에 대한 새로운 역할을 정의하고 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다.

은퇴 이후 가정에서는 '경제적 부양자'라는 무거운 짐을 덜 수 있다. 하지만 지금껏 경제권을 쥐고 있는 사람으로서 누리던 권위를 기대하기 어렵다. 직장에서도 정점에서 벗어나 밑바닥으로 돌아가야 한다. 출발점에 다시 서서 새로 시작해야 한다. 사회에서 갑(甲)에서 을(乙)로 입장이 변화하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나 때는 말이야'가 아닌 '나도 그랬어'

은퇴라는 새로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첫째는 현재 세대에 적응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긴 세월을 혼자 살 순 없다. 어울려 살아야 한다. 그러려면 현재 세대를 받아들이고 배워야 한다. 서로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수평적 문화, 혼자 즐길 수 있는 생활, 젊은 사람을 이해할 수 있어야 어울려 살 수 있다. 은퇴 후 자녀와의 관계가 가장 힘들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린다. 자녀와 소통하려면 자녀 세대를 이해하고 배울 수 있어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고 귀는 열라'는 말이 있다. 영화 '인턴'은 이를 잘 보여준다. 영화 속 주인공 벤 휘터커(로버트 드니로)는 한 회사 임원 출신인 70세 노인이다. 그는 한 인터넷 의류 업체에 '인턴'으로 취직한다. 과거 직장에서 비롯된 노하우와 인생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직장인의 고민을 잘 들어주고, 그래서 존경받는 인물이 된다. 이제는 '나 때는 말이야'가 아니라, '나도 그랬어. 너희 때는 충분히 그럴 수 있어'라는 현재 세대를 존중하는 열린 마음을 준비해보자.

조지 베일런트 하버드대 교수는 '행복의 조건'에서 "인간의 말년을 불행하게 하는 건 경제적 빈곤이 아니라 사람의 빈곤"이라고 지적했다. 현역 때는 자연히 많은 사람과 어울려 지낸다. 찾아오는 사람도 많고 일터에서도 사람들과 어울린다. 그러나 은퇴 이후에는 사람 만나는 게 쉽지 않다. 전화하는 것도 괜히 미안하다. 따라서 은퇴 이후에는 인간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일 때문에 이 사람, 저 사람과 어울렸다면, 이제는 진짜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찾아 나서야 한다. 지난날 좋았던 사람, 나와 잘 지낼 수 있는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자.

은퇴 이후 '허무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지금껏 가족에 대한 부양을 위해 열심히 뛰어 왔는데 이제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제 은퇴를 의무에서 벗어나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 시기라 생각하자. 미리 은퇴 후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적어보자. 단기·중기·장기로 나눠 실천해 나가자. 오롯이 나만의 인생을 계획하고 그렇게 살아보자.

◇행복한 은퇴 위해선 미래 현금 흐름 미리 준비해야

은퇴 후 가장 큰 리스크는 은퇴 자금이 고갈되는 일이다. 많은 사람은 은퇴 후를 대비해 목돈을 쌓아둔다면 아무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머튼 교수는 "노후 준비에는 자산 축적보다 꾸준한 현금 흐름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은퇴 후 원하는 삶을 살려면 꾸준히 현금이 들어와야 한다는 얘기다. 이제 은퇴 이전에 얼마만큼의 자산을 모을 수 있을지, 이 자산에서 매월 얼마만큼의 현금이 나올 수 있는지 미리 계산해야 한다. 그에 맞춰 쓸 수 있는 만큼만 써야 한다.

지난해 국민연금공단 국민연금연구원에 따르면, 노후 생활비로 필요한 돈은 가구당 월 243만원 규모라고 한다. 그러나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은퇴 전 소득 대비 은퇴 후 소득이 얼마인지 보여주는 지표)은 2020년 기준 44%에 그친다. 더군다나 해마다 0.5%씩 줄어 2028년 이후에는 40%에 불과할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미래 현금 흐름을 유지하려면 미리 개인적으로 연금에 들어 노후를 준비하는 게 꼭 필요하다. 그냥 찾아오는 행복은 없다. 하지만 인생 2막은 내가 원하지 않아도 찾아온다.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려면 미리 준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