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여우'로 불린 에르빈 롬멜(1891~1944)은 2차대전 당시 독일 군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지휘관으로서 훌륭한 전략가였고 동시에 뛰어난 리더십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나치에 충성한 군인이었고 그의 부대가 매설한 지뢰로 막대한 인명 피해를 낳았다는 점에서 비난도 받고 있다. 그런 롬멜의 고향에서 그의 공(功)과 과(過)를 함께 기억하자는 상징적인 조치가 취해졌다.

23일(현지 시각) 독일 남부 하이덴하임에 있는 에르빈 롬멜 기념비 앞에서 한 남성이 지뢰 피해자를 상징하는 금속 조각상을 바라보고 있다.

23일(현지 시각) 공영방송 도이체벨레에 따르면, 독일 남부 소도시 하이덴하임시는 최근 롬멜의 기념비 앞에 한쪽 다리가 잘려 목발을 짚고 있는 지뢰 피해자를 상징하는 높이 140㎝짜리 검은색 금속 조각상(像)을 세웠다.

롬멜 기념비 앞에 그의 과오를 보여주는 또 다른 상징물을 만든 이유는 역사 속 인물을 어느 한쪽 측면으로만 평가하면 안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롬멜은 1940년 프랑스 전선에서 혁혁한 전공을 올렸고, 1941년에는 북아프리카에서 독일의 아프리카군단을 이끌며 수많은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북아프리카에서 1700만개에 달하는 지뢰를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간 디벨트에 따르면, 2차대전 당시 리비아와 튀니지에서만 지뢰로 3300여 명이 숨졌고, 7500여 명이 하지 장애인이 됐다.

아프리카에 참전했던 독일군 예비역들이 중심이 돼 1961년 롬멜의 고향인 하이덴하임에 기념비를 세웠다. 하지만 전쟁을 일으키고 지뢰로 많은 인명을 살상했다는 이유로 그의 기념비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특히 올해 미국에서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숨진 사건을 계기로 서구 국가 각지에서 논란이 있는 역사적 인물의 동상이 잇따라 철거되자 독일 사회 일각에서도 롬멜의 기념비를 없애자는 요구가 커졌다. 그러자 고심 끝에 하이덴하임시는 기념비를 그대로 두되 그 앞에 롬멜의 과오를 상징하는 지뢰 피해자상을 설치한 것이다. 하이덴하임의 베른하르트 일그 시장은 "하나의 진실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알아서 진실을 찾도록 돕는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