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병약했다. 몸이 아프니 농사일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전답도 얼마 안 되는 영세농이었다. 농사일을 못하니 하나부터 열까지 남의 손이 필요했다. 가뜩이나 소출은 적은데 남의 손을 빌리니 실제 소득도 적었다.

아버지는 위장이 좋지 않아 이밥(쌀밥)을 드셔야 했다. 쌀이 부족해 장리쌀(장려쌀)을 빌리곤 했는데, 한 되를 빌리면 가을에 한 되 반을 갚는 식이었다. 지금의 고리채와 비슷한 방식이었다.

국민학교 6학년 가을 어느 날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내년에는 중학교 입학금과 공납금이 엄청나게 오른단다." "박정희가 혁명을 하고 나서 돈이 없으니 공납금을 많이 올린다는 소문이 자자하다"면서 "중학교에 보낼 형편이 못 된다"고 했다. "예, 알았습니더." 짧게 대답하고는 방을 나왔다.

나는 외가에서 학교를 다녔다. 외가는 우리 집보다 형편이 더 좋았다. 평소 외할머니는 "호야, 니는 졸업하면 엄마 일 거들어라" "중학교 가지 말고 엄마 거들어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온 터였다. 우리 집 어려운 사정을 훤히 아는 외할머니는 고생하는 당신의 딸이 안쓰러웠을 것이다. 나 또한 알고 있었다. 중학교는 내가 갈 수 없는 아득한 곳에 있다는 걸. 그래서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중학교 입학 원서 한번 못 내보고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4학년 때까지 분유가 배급되었다. 분유를 받으면 집에 가져와 쪄서 먹었다. 5학년 때부터 미국의 원조가 줄어 옥수수 가루가 나왔다. 이때부터 학교마다 급식소라 하여 커다란 가마솥을 걸어놓고 옥수수 죽을 쑤어주었다. 이른바 꿀꿀이죽. 학교에서는 도시락을 못 가져오는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 옥수수 죽을 주었다. 나도 옥수수 죽 단골이었다.

어머니는 가난한 집안 맏며느리였다. 굶기를 부자 밥 먹듯 하였으며 형님을 낳고는 영양실조로 엉금엉금 기어다녔다고 한다. 보릿고개인 겨울부터 봄까지는 아침 밥, 저녁 죽이 당연했다. 죽도 국수도 많이 먹었지만 손이 덜 가는 깐데기는 단골 메뉴였다. 펄펄 끓는 물에 밀가루 반죽을 뜯어 넣고 애디(애호박 채)를 숭숭 썰어 넣을 때, 나는 엄마 옆에서 군침을 꼴깍 삼키며 서 있었다. 일손 바쁜 농촌에서 허기를 면하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이제는 수제비가 된 깐데기 하면 엄마가 생각난다. 가슴 아린 향수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