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왕국 프로이센

크리스토퍼 클라크 지음|박병화 옮김 마티|1056쪽|4만9000원

1947년 2월 25일,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 수도 베를린에 모인 승전국 대표들은 프로이센주(州)와 주 정부를 폐지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이로써 1417년 뉘른베르크의 호엔촐레른 가문이 브란덴부르크 땅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부터 사들이며 시작된 프로이센 500년 역사가 막을 내렸다. 종말은 전쟁이 끝나기 전에 이미 예정돼 있었다. '오래전부터 독일 군국주의와 반동주의의 온상이었던 프로이센주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법안 전문은 프로이센을 보는 서방의 오랜 선입견을 드러냈다. 한 역사가는 '나치즘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프로이센이란 만성질환의 급성증상'이란 말로 '프로이센 지우기'의 정당성을 옹호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역사 교수인 저자는 이 평가에 이의를 제기한다. 저자에 따르면 프로이센은 두 얼굴을 지닌 야누스다. 한쪽엔 군국주의와 반동주의의 음영이 짙게 드리워져 있지만, 다른 쪽에선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앞선 군사기술과 잘 정비된 교육제도, 낮은 문맹률을 자랑하는 진보적 국가가 있다. 두 얼굴의 프로이센을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 저자는 통사라는 서술 방식을 택했다. 프로이센은 브란덴부르크 선(選)제후국으로 시작해 프로이센 왕국으로 성장했다. 보불전쟁 승리로 독일통일을 완수하며 정점에 섰지만, 1차 세계대전 패배로 1918년 11월 빌헬름2세가 망명길에 오르며 순식간에 무너졌다. 저자는 이 역사를 시간 순으로 배열하면서도 통치자의 집념, 우연의 개입, 개인의 성품이 역사에 끼치는 영향, 인간적 오해로 인한 아이러니 등으로 점철된 흥망의 드라마를 펼친다. 가령, 철혈재상으로 유명한 비스마르크의 정치를 설명할 때 저자는 그의 노회한 술수, 때론 황제마저 겁박하는 배포, 통일 과업을 달성한 흔들림 없는 추진력을 서술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프로이센 귀족의 오만과 자존심을 엿보게 하는 젊은 시절 편지를 함께 보여준다.

보불전쟁에서 승리하며 독일 통일을 완수한 프로이센 왕 빌헬름1세가 1871년 1월 18일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황제 대관식을 치르고 있다.

프로이센은 30년전쟁과 7년전쟁, 나폴레옹 전쟁에서 입은 참화를 딛고 일어나 독일 통일의 주역으로 우뚝 섰다. 저자는 그 비결로 호엔촐레른 가문의 야망과 분별력을 꼽는다. 브란덴부르크의 척박한 모래벌판에 둥지를 튼 이 가문이 국토를 넓히기 위해 벌인 노력은 집요하다 못해 눈물겹기까지 하다. 제후국 동쪽, 프로이센 공국의 상속권을 갈망했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왕비가 죽자 프로이센 출신 며느리의 여동생과 재혼해 아들의 손아래 동서가 된 사례도 있다. 영토 확장에 열성적이었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적에게 잡히면 자살하기 위해 독약이 든 병을 목에 걸고 전쟁터에 나갔다.

통일 주도권을 두고 오스트리아에 거둔 최종 승리는 국력의 의미를 곱씹게 한다. 오스트리아는 총구에 총알을 넣는 구식 총을 썼고, 프로이센은 오늘날처럼 뒤에서 장전하는 신식 총을 썼지만 그것이 승패를 가른 결정적 요소는 아니었다. 저자는 튼튼한 재정과 잘 깔린 철도, 낮은 문맹률을 프로이센의 승인으로 꼽았다.

프로이센은 청렴한 행정, 효율적인 관료제, 부지런한 국민, 유럽 최고 수준의 교육을 자랑하는 문명국가였다. 그러나 동시에 반(反)자유주의와 불관용으로 점철된 정치문화, 법보다 권위를 숭배하는 성향을 드러냈다. 왕조가 망한 뒤 주정부 형태로 살아남은 프로이센은 극심한 내부 갈등을 겪었다. 옛 귀족들은 황제 시절을 그리워하며 강력한 독재자가 나타나길 갈망했고, 반대편에 선 자유주의자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보루가 되려 했다. 히틀러가 등장하자 그의 돌격대를 법적으로 금지한 것도 프로이센 주정부였다.

그러나 프로이센 민주주의는 ‘독재자에게 환호하는 국민’이란 벽 앞에서 무너졌다. 나치 시절, 프로이센인들은 게슈타포에 협력하며 히틀러의 개가 되거나, 정반대로 그를 암살하기 위해 투쟁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을 흠모했고, 그 시절 프로이센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던 히틀러가 프로이센의 마지막 숨통마저 끊었다는 사실도 프로이센 멸망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