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지음|황가한 옮김 웅진지식하우스|464쪽|1만8500원

원제도 '보이지 않는 여자들(Invisible Women)'이다. 세상 인구의 절반은 여자인데 보이지 않는다니 무슨 뜻인가. 영국 여성운동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인류 역사의 기록에는 데이터가 누락되어서 생긴 커다란 구멍이 하나 있다"고 말한다. 남성을 보편과 표준으로 여기고 여성을 특수하고 예외적으로 취급해 생기는 '젠더 데이터 공백'이다. 젠더(gender)란 성별(sex)과 달리 "생물학적 사실에 부여되는 사회적 의미, 여자가 여성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대우받는 방식"을 말한다. 젠더 데이터 공백은 우리 삶 곳곳에 스며 있다. 매일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 평균 크기는 5.5인치(13.97㎝). 남자들 평균 손 크기 7.6인치(19.3㎝)에 맞춰진 것이다. 손 평균 크기가 6.8인치(17.2㎝)인 여자들은 겨우 쥘 수 있다. 평소 스마트폰을 자주 떨어뜨렸다면 여자인 당신 잘못이 아니다. 사무실 온도는 40세 70㎏ 남자의 기초대사율을 기준으로 설정됐다. 한여름 에어컨 시스템을 갖춘 사무실 온도는 여자에게 적정한 온도보다 평균 5도 정도 낮다. 여자 직원들은 담요를 준비하는 반면 남자 동료들은 여름옷을 입고 돌아다닌다. 데이터 공백은 여성의 생명까지 위협한다. 자동차 충돌 실험은 대개 177㎝, 76㎏ 남성 인형이 사용된다. 그래선지 교통사고 때 여자가 중상을 입을 확률은 남자보다 47% 높고, 사망 확률은 17% 높다. 여자는 운전할 때 대개 남자보다 더 앞으로 다가앉는다. 평균적으로 남자보다 키가 작기 때문이다. 다리를 뻗어 페달에 닿게 하고, 허리를 똑바로 세워야 계기판 너머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이런 불편한 자세는 사고 때 내부 손상을 입을 확률이 더 높다. 목뼈 손상을 입을 확률은 남자의 최대 3배에 달한다.

편향된 데이터는 세계의 절반인 여성을 ‘투명 인간’으로 만든다. ‘일하는 여자’라는 표현은 집안일을 일로 여기지 않는 편견을 드러낸다. 저자는 “일하지 않는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젊은 여성이 심장 질환으로 사망할 확률은 남성의 2배에 이른다. 환자가 위험한 상태라는 걸 의사들이 제때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국 국민보건서비스 지침은 "갑자기 심장 쪽에 심한 통증을 느끼는 환자는 24시간 심장센터로 이송하라"고 하고 있지만, 여자 환자는 가슴 통증 없이 복통과 메슥거림만을 느끼기도 한다. 심장병 예방약으로 자주 처방되는 약물은 거의 남자 환자만을 대상으로 시험되고 있다.

아이들은 커가면서 성 편견을 내면화한다. 남녀 아이들에게 과학자의 모습을 그려보라고 했다. 다섯 살 무렵엔 남녀 과학자를 그리는 비율이 비슷하다가 7~8세가 되면 과학자를 남자로 그리는 수가 앞서고, 14세가 되면 남자 과학자를 그리는 비율이 4배가 된다. 1960년대엔 여자 과학자를 그린 아이 비율이 1%에 불과했다. 최근엔 그 비율이 28%로 올랐지만 현실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다. 영국은 고분자화학 전공자 86%, 유전학 전공자 57%, 생물학 전공자 56%가 여자다.

젠더 데이터 공백을 메우는 일이 긴요하다. 그런데 여성 권익을 높이면 남자 역차별이 아니냐는 목소리가 터져나올 듯하다.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젠더 데이터 공백을 메우는 일은 남녀 모두에게 이득이라고 설득한다. 스웨덴 칼스코가시(市)의 제설 작업 사례를 든다. 시가 인도에 쌓인 눈부터 치우자 보행자 사고 발생률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 보행자 대부분이 여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취한 조치였다. 여성들은 아이들 학교 데려다주기, 노인 가족 병원에 데려다주기, 퇴근길 장보기 등 '무급 노동'에 남자보다 더 시간을 쓴다. 제설 정책을 바꾸기 전 겨울철 보행자 사고로 발생하는 비용은 도로 관리 비용의 약 2배였다. 세계경제포럼은 27%에 이르는 남녀 취업률 격차를 없애면 미국의 GDP는 9%, 유로존의 GDP는 13% 증가할 것으로 전망한다.

책은 기술·의료·노동·도시계획·정치·재난상황 등 16가지 영역에 걸쳐 여성에 대한 데이터 공백이 삶에 미치는 영향과 차별의 모습을 치밀하게 보여준다. 남자가 문제라고만 지적하지 않는다. 데이터 공백은 남자의 악의나 고의로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천년 동안 존재해온 사고방식의 산물일 뿐이기에 일종의 무념이라 할 수 있다.” 남자만 아니라 여자도 ‘무념’을 깨뜨리라는 주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