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정진우 감독의 1966년 영화 '초우(草雨)'를 디지털 복원해서 영상(블루레이)으로 출시했다. 신성일·문희 주연의 이 작품은 '한국 영화 100선'을 꼽을 때마다 빠지지 않는 멜로극의 고전. 개봉 당시에도 이런 호평을 받았다. "'쉘부르의 우산'을 생각나게 하는 율동적인 연출, 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류(流)의 대담한 영상 커트, 재래형에서 완전히 탈피한 몽타주 등 20대의 정진우 감독은 놀랄 만한 전신(轉身)을 보여준다."(조선일보 1966년 6월 12일 자) 영화는 유튜브(www.youtube.com/user/KoreanFilm)에서도 볼 수 있다.

"가슴속에 스며드는 고독이 몸부림칠 때, 갈 길 없는 나그네의 꿈은 사라져 비에 젖어 우네. 너무나 사랑했기에…." 영화의 첫 장면에서 흐르는 주제곡이 가수 패티 김의 '초우'다. 전형적인 단조 트로트풍으로 시작하는 듯싶지만, '너무나 사랑했기에'라는 중간 소절부터 프랑스 샹송처럼 그윽한 분위기를 낸다. 과하지 않게 살짝 넣은 반음(半音)과 왈츠풍의 3박자에 곡의 묘미가 숨어 있다. 그렇기에 소주와 포도주 어느 쪽에도 어울린다.

‘초우’의 정비공 철수(신성일)와 식모 영희(문희).

패티 김과 후배 조영남의 대담집 '그녀, 패티 김'에는 이 곡에 얽힌 일화가 소개돼 있다. 미8군 무대로 데뷔한 패티 김은 일본을 거쳐 미국 진출을 꿈꿨다. 그때 '마포종점'과 '섬마을 선생님'의 작곡가 박춘석(1930~2010)이 "해외에 가더라도 고국에서 기억해주는 자기 노래 한 곡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면서 붙잡았다. 결국 '초우'는 패티 김이 출국한 뒤 라디오를 통해서 사랑받았다. 패티 김은 '얼굴 없는 가수'의 원조가 된 셈이다.

영화 '초우'는 기업가 아들로 행세하는 자동차 정비공(신성일)과 주불(駐佛) 대사의 딸인 척하는 식모(문희)의 비극적 사랑을 그렸다. 신분 상승의 욕망에 이글거리는 신성일의 눈빛은 1960년 프랑스 영화 '태양은 가득히'를 연상시킨다. 레인코트 차림으로 명동 시내를 뛰어다니는 문희의 모습도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의 여주인공이 부럽지 않다.

그러나 서로의 정체가 탄로나는 순간, 장밋빛 환상은 깨지고 남루한 현실만 남는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패티 김의 '초우'가 다시 흐른다. 같은 곡이지만 처음보다 훨씬 더 짙고 처연하게 들린다. 1960년대 경제성장이 본격화하던 시절의 세련미와 신파조(新派調)의 애절함이 공존하는 문제작. 그 점에서 영화와 노래는 닮은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