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후 4시쯤 서울 청담동 명품거리에 있는 민간 금 유통업체 한국금거래소. 벽면 한쪽 모니터에서 ‘오늘의 순금 시세:28만원(1돈·3.75g)’을 알리는 문구가 깜빡이고 있었다. 이날 거래소에는 금을 사고팔려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왔다.

올봄 자녀 혼수로 1㎏짜리 골드바 2개를 1억4000여만원에 구입했다는 한 50대 여성은 금 투자 상담을 받기 위해 거래소를 찾았다. “‘금값이 올랐다’는 기사를 보고 왔다”는 서모(35)씨는 짝 잃어버린 14k 귀걸이, 18k 목걸이 펜던트 0.2g을 3만3000원에 팔고 갔다. 4년차 직장인 박모(33)씨는 “지난 3월부터 투자 목적으로 매달 금 한 돈(3.75g)씩을 모으고 있다”고 했다.

2020년 7월 금 값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올 들어 금값이 고공 행진하면서, 금 시장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여파로 안전 자산 수요가 높아지면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미국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지난달 20일 “1년 안에 국제 금값이 사상 최고가인 온스(약 31.1g)당 2000달러까지 오를 수 있다”고 전망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 등 주요국 중앙은행이 경기 부양책으로 푼 돈이 안전 자산인 금으로 몰리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국내 상황도 마찬가지다. 14일 한국거래소(KRX) 금 시장에서 금 현물 가격(1g)은 전일보다 100원(0.14%) 오른 7만원에 거래를 마쳤다. KRX 금 시장이 개설된 2014년 3월 이후 역대 최고치다. KRX 금 시장의 최저가는 2015년 12월 3일의 3만9900원. 이때와 비교하면 금값은 75.4% 뛰었다.

◇①결혼반지 대신 골드바, 금테크 나선 밀레니얼

이날 오후 서울 종로3가의 귀금속 거리 역시 청담동 금 거래소와 마찬가지로 분주했다. 금은방 상인들은 “까르띠에·불가리·쇼메 같은 명품 주얼리 브랜드에 빼앗겼던 혼수 예물 시장에 신혼부부들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며 “‘명품 스타일’ 결혼반지나, 금비녀·금가락지 같은 전통 예물도 아닌 ‘골드바’를 사러 온다”고 했다.

15일 낮 서울 종로3가 귀금속 상가 거리에 '최고가 금 매입'을 안내하는 금은방 앞을 행인이 지나가고 있다. 최근 결혼 반지 대신 골드바를 예물로 구입하는 신혼부부가 늘고 있다고 한다.

지난 2월 까르띠에 결혼반지를 포기하고 골드바 800만원어치(90g)를 사들였다는 30대 신혼부부는 “어차피 매일 끼고 다니지도 않고 집에 모셔둘 거라면, 후일을 대비해 ‘리셀(resell·재판매)’하기 좋은 형태로 보유하는 게 낫다”고 했다.

금은 올 들어 가장 높은 수익률을 올리고 있는 재테크 수단이다. 대신증권에 따르면 1월부터 이달 10일까지 KRX 금 시장 시세는 23.29% 상승했다. 같은 기간 정기예금 수익률(0.79%)의 29.5배에 달하는 상승률이다. 금은 달러(4.2%), 채권(2.1%), 부동산(1.8%), 주식(-4.0%) 등 다른 재테크 수단 수익률도 압도했다.

금 테크는 밀레니얼 세대가 이끌고 있다. KRX가 지난 3월 말 국내 5대 증권사의 ‘금 거래 위탁계좌’를 분석한 결과, 보유자의 38.5%가 30대, 17.6%가 20대인 것으로 나타났다. 절반 이상(56.1%)이 밀레니얼인 셈이다. 40대는 28.8%, 50대는 11.5%, 60대 이상은 3.6%였다. 한국거래소는 “증권 시장에 익숙한 젊은 층이 금을 투자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했다.

◇②쏟아지는 매물 잡아라…금은방 출장 매입까지

금이 ‘진짜 금값’이 되면서, 상점들은 저마다 ‘금 매입 시세, 더 드립니다!’ 같은 안내문을 붙이며 매입 경쟁을 벌이고 있다.

서울 종로3가의 귀금속상가는 금 값이 뛰자 '매입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사진은 2011년 8월 금값이 치솟았을 당시 종로 풍경.

‘출장 매입’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까지 등장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외출을 꺼리는 자산가를 직접 찾아가 현장에서 금을 사들이는 것이다. 경력 20여년의 한 금 거래소 직원은 “출장까지 가서 금을 매입한 건 코로나 이후 처음 해봤다”며 “지난 4월 한 고객이 금 50돈을 되팔고 싶다고 해서 목포까지 찾아갔다”고 했다. “‘금 판 돈으로 주식을 하고 싶다’고 해서 말렸는데 기어코 팔더군요. 수익이 났을지 궁금하네요.”

금 거래소들은 '더 드림!' '더 많이!'를 강조하며 홍보에 나섰다.

◇③상반기 KRX 금 거래량=한 돈짜리 금반지 295만개

금 거래량은 무섭게 치솟는 중이다. 올해 상반기(1~6월) KRX 금 시장의 하루 평균 거래액은 57억8000만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39.8%, 거래량은 90㎏으로 106.4% 늘었다. 상반기 누적 거래액(7103억원)은 이미 지난해 연간 거래액(5919억원)을 뛰어넘었다. 거래량은 11.064t으로, 한 돈짜리 돌 반지로 환산하면 반년 동안 295만개가 팔린 셈이다. KRX 금 시장은 올해 거래대금이 처음으로 1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국금거래소의 올해 상반기 금 매물 건수(3만8211건)도 지난해(1045건)보다 무려 36.6배 늘었다. 이 기간 이 업체가 사들인 금은 3600㎏으로 지난해 매입량(127㎏)의 28.3배에 달했다.

◇④코로나 쇼크, 금붙이 급처분 늘어

한국금거래소 김수호 감정사는 “올해 매물이 쏟아지는 건 코로나 여파로 급전을 마련하려는 이들이 늘어난 영향도 크다”고 말했다. “석 달 전에는 무급 휴직 상태가 된 30대 주방장이 15돈짜리 금목걸이를 팔아 생계비를 마련하더군요. 지난 10일에는 30대 후반 부부가 아파트 중도금을 마련한다고 금 열쇠, 아기 돌 반지 등 집안 금붙이를 모두 모아 2000만원을 가져갔어요.”

지난 5월 14일 부산의 한 장례식장에서 발생한 시신 금니 절취 사건. 금니를 훔친 장례지도사는 지난 12일 1심 법원에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12일 부산지법 서부지원은 지난 5월 부산의 한 장례식장 시신 안치실에서 시신의 금니 10개를 뽑아 훔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30대 장례지도사에게 징역 10개월을 선고했다. 이 장례지도사는 재판에서 “코로나 영향으로 월수입이 100만원에 불과해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했다.

◇⑤튜닝의 끝은 순정, 기념품 인기는 시들

이날 만난 금은방 관계자들은 “금 시장이 뜨겁지만, ‘순금 기념품’은 올해 인기가 없다”고 했다. 돼지·십장생·행운의 열쇠·두꺼비 같은 순금 기념품은 시대상을 반영하는 품목이다. ‘평생직장’ 샐러리맨, 장기 근속자를 위한 황금 명함·열쇠류는 10여년 전부터 찾는 곳이 크게 줄었다. 대신 2014년 영화 ‘명량’ 열풍으로 ‘금거북선·금이순신 장군’이 등장했고, 2017년에는 ‘흙수저·금수저 계급론’이 부상하면서 ‘미니 금수저’가 인기를 끌었다. 반일(反日)불매운동이 벌어진 지난해에는 ‘독도 금메달’이 출시되기도 했다.

순금 기념품은 시대상을 반영한다. 맨 윗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금이순신 장군, 금거북선(2014년), 미니 금수저(2016~2017년), 독도 금메달(2019년), 골드바(현재).

업계 관계자들은 “금융 시장이 불안할수록, 금도 디자인·의미보다는 중량·순도만 따지는 분위기”라며 “안전 자산으로 금을 찾는 이들은 별다른 세공을 하지 않은 골드바 형태를 선호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