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문학 번역의 베테랑 김난주(62)는 '전략'이란 말을 자주 썼다. 무라카미 하루키·요시모토 바나나·히가시노 게이고 등 일본 베스트셀러 소설들을 다수 번역했다. 그의 이름은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겐 믿고 읽을 수 있는 인장(印章)으로 통한다. 그는 "번역은 읽는 사람에게 어떻게 더 잘 전달할 수 있을지 전략이 필요하다"면서 "한국 독자가 읽기에 적절한 단어와 문장을 전략적으로 선택하려 한다"고 했다.

그가 하루키 열풍의 시초가 된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새롭게 번역했다. 1992년 그가 번역해 '일각수의 꿈'이란 제목으로 국내 처음 소개됐다. 번역가의 길로 이끌어준 작품을 28년 만에 다시 마주한 것이다. 김난주는 "둘째를 낳고 반년 정도 지나서 이 작품으로 번역을 처음 시작했는데 그 애가 올해 서른이 됐다"고 했다.

김난주는 "처음 번역을 시작할 때의 나 자신과 마주하는 게 두려워서 이전 번역은 참고하지 않았다"면서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우리 말과 언어를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됐지만 그만큼 고민도 커졌다"고 했다.

당시 작품의 매력에 흠뻑 빠져 출판사가 정해지기 전부터 번역에 뛰어들었다. 김난주는 "평행 세계가 등장하는 형식부터 판타지와 현실이 뒤섞인 스토리까지 한국 문학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면서 "다른 것 다 제쳐놓고 번역하고 싶었고, 그 무모한 욕구가 번역가의 길을 열어줬다"고 했다.

소설은 일각수가 사는 아름다운 마을 '세계의 끝'과 암호와 해독을 놓고 계산사와 기호사가 대결을 벌이는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두 평행 세계를 오가며 진행된다. 김난주는 "초보가 번역하기엔 대작이라 열정과 에너지는 넘쳤지만 작품 안에서 허우적댈 수밖에 없었다"면서 "이제는 작품 전체를 조망하면서 지휘할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했다. "다시 번역해보니 인간의 일상이 사라진 '세계의 끝'에서 사람들의 흔적을 더듬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우면서도 슬프더라고요."

그는 하루키를 "번역가 입장에선 '러키(Lucky)한' 작가"라고 표현했다. "하루키는 좋은 일본어를 사용해 퍼즐을 빠짐없이 맞춘 상태로 작품을 내놔요. 번역가가 보충해서 채워넣을 필요가 없는 거죠. 요시모토 바나나는 아주 예쁜 글을 쓰지만, 행간이 넓어 퍼즐이 빠져 있는 부분을 메우기 어려울 때가 있거든요."

수많은 작가를 번역했지만,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이 가장 많다. 둘은 한국과 일본을 오갈 때마다 만나는 친구 사이다. "한번은 바나나가 이승기 팬이라 콘서트를 같이 보러 갔거든요. 길을 못 찾을까 봐 제가 화장실 앞에서 기다렸더니 감동을 받았는지 본인 에세이에도 썼더라고요."

작가와 만나도 작품에 관한 이야기는 피한다. 번역에서 작가와의 소통은 꼭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그는 "작가는 작품으로서 하나의 세계를 던져놨고, 이 세계에 대한 고민은 나의 역할"이라고 했다. 작가에게 연락할 때는 명백한 실수를 발견했을 때뿐이다. "오에 겐자부로 작품을 번역할 때인데, 분명 앞에 나왔던 사람인데 이름이 다른 거예요. 하도 등장인물이 많으니까 작가도 헷갈렸던 거죠."

그는 "텍스트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번역은 자유를 억압받는 일이자 철저히 외로운 싸움"이라고 했다. "일상생활에서만큼은 작품의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최대한 밀어내려는데, 꿈에 가끔 나타나요. 작가랑 등장인물이 나타나 일본어로 말을 걸면서 괴롭혀요."

하루키 소설 속 평행 세계처럼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면, 어떤 삶을 살 것 같으냐는 질문에 "그게 요즘 저의 숙제"라고 답했다. "번역을 시작한 이후의 인생에는 애들과 일밖에 없었어요. '나한텐 이 인생밖에 없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애들과 일밖에 없던 인생에서 내가 간과하거나 놓쳤던 게 뭘까, 달리 원하는 게 있었을까 그 대답을 찾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