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없고 다음 회가 궁금하지도 않아. 안 돌아가는 맷돌(머리) 그만 굴려." 완성된 만화 원고를 본 아내가 말했다. 마감 이틀 전, 스토리를 전부 엎었다. "모든 것은 '맷돌'이라는 말에서 시작됐다. 머릿속 뇌세포들이 거대한 맷돌을 돌리며 인간을 조종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웹툰 작가 이동건(39)씨가 말했다.

웹툰 '유미와 세포들' 극 중 캐릭터.

"운명은 없다. 선택뿐이다." 요정처럼 생긴 수많은 체내 세포가 모든 결정을 좌우한다는 설정의 웹툰 '유미의 세포들'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를테면 성욕은 '응큼 세포', 식욕은 '출출이 세포', 후회는 '뒷북 세포'의 활성화 때문이다. 참고로 '응큼 세포'는 바지를 입지 않는다. 2015년 첫 연재 후 20~30대 여성 독자의 전폭 지지를 얻으며 흥행(누적 조회 수 30억회) 중인데, 최근 TV 드라마와 극장용 애니메이션 제작이 확정됐고, 떡볶이·과자·라면 등 관련 식품까지 시판되고 있다. 이씨는 "젊은 세대의 고민을 공유하면서도 경쾌한 느낌을 주는 캐릭터의 힘 덕분"이라고 했다.

여기에 체험형 전시까지 추가됐다. 서울 통의동 그라운드시소 서촌 개관전으로 내년 3월까지 열리는 특별전인데, 원화 및 미디어아트·쌍방향 게임 등으로 구성한 것이다. 열혈 독자를 위한 줄거리 시험 문제지 뿐 아니라, 유미의 전(前) 남자친구가 그려진 샌드백을 관람객이 직접 두들겨 팰 수 있도록 걸어놓기도 했다. "웹툰이 전시 공간 전체를 채운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만화가의 이미지가 누추한 골방을 벗어나고 있는 것 같아 기분 좋다."

이동건 작가

30대 여주인공 김유미의 연애사를 다루는 단순한 내용이지만, 인기 요인은 탁월한 여성(주인공)의 심리 묘사에 있다. 이씨가 여자인 줄 아는 사람도 꽤 된다. "여자들이 뭘 먹을 때 늘어뜨려진 머리카락이 입에 딸려 들어가는 모습, 애인과 헤어진 친구의 발언 같은 일상의 면면을 잘 기억해 써먹는다"고 했다. 그리고 아내의 공(功)이 크다. "이 작품의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지적도 많이 해준다. 느끼한 대사도 잡아주고."

지금껏 200개 가까운 세포가 등장했다. 이씨는 "내 안의 가장 강력한 세포는 '변덕 세포'"라고 했다. "미술대학에서 디자인을 공부하다 자퇴했다. 다른 일을 해보고 싶어 이곳저곳 기웃거렸다." 밴드에서 10년 정도 베이시스트로 활동했고, 결국 생계를 위해 문구 디자인 회사에 들어갔다. "다이어리용 스티커를 만들었는데, 판매 촉진을 위해 홍보용 만화를 그려봤다. 둥글둥글한 그림체는 거기서 나왔다." 기왕 만화를 그렸으니 웹툰으로 제작해 투고했고, 서른 살에 정식 작가가 됐다.

이 선택이 인생을 바꿨지만 모든 선택이 주체적인 것은 아니었다. "댓글에 휘둘려 독자의 요구 사항대로 맞춰 그린 적도 있다. 그러다 작년 겨울 누가 긴 댓글을 남겼다. 작가가 독자 눈치 보느라 무난한 줄거리만 쓴다고. 정곡을 찔렸다." 이후 그는 그냥 자신의 선택을 믿기로 했다. "지금보다 가볍게 그리고 싶다. 약속 장소에서 친구 기다리면서 볼 수 있는, 내가 좋아하는 '도라에몽'처럼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즐길 수 있는 만화." '유미의 세포들'은 올해 완결 예정이다. "차기작도 일상 만화가 될 것 같다. 나는 사소한 이야기가 좋다." 이씨의 세포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