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서울시장이 비서 출신 여성으로부터 성추행 혐의로 고소된 바로 다음 날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 죽음 앞에서 도를 넘는 '2차 가해'와 '망자(亡者) 조롱'이라는 반(反)사회적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친여(親與) 진영에서는 피해 신고 여성을 향해 "여성이 벼슬이냐"고 꾸짖고, 반대쪽에선 박 시장 분향소 앞에서 고인(故人)을 동물에 빗대며 바나나 퍼포먼스를 벌였다. 서로가 정치적 반대 진영을 향한 극단적인 공격성만 드러낼 뿐, 피해자나 고인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예의조차 지키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적어도 죽음 앞에서는 잠시나마 갈등과 정쟁을 중단했던 우리 사회 최소한의 품격마저 무너진 느낌"이라고 말한다.

12일 오후 박 시장 빈소가 차려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선 남자 2명이 '가정파괴 꽃뱀 범죄 반드시 척결하자'는 현수막을 펼치다가 병원 측에 의해 쫓겨났다. 성추행 피해 신고 여성을 '꽃뱀'에 비유한 것이다. 전날 인터넷에선 "난중일기에서 관노와 수차례 잠자리에 들었다는 구절 때문에 이순신이 존경받지 말아야 할 인물이냐"고 적은 글을 수십명이 추천했다.

유명 인사들도 2차 가해에 동참했다. 친여 논객 전우용씨는 11일 페이스북에 "그(박 시장)가 한 여성에게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아직 모른다"며 "여성들이 박원순만 한 남자 사람 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라고 적었다. 인터넷 매체에 글을 쓰는 '시민기자' 이모씨는 같은 날 페이스북에 "여성이 뭔 벼슬인가 싶다. 성폭력이 그렇게 큰 죄인가"라고 적었다가 논란이 일자 하루 만에 글을 지웠다.

애초 피해 여성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여당 정치인들의 추모가 사태의 발단이라는 지적이 있다. 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박 시장 극단적 선택 이유에 대해 "맑은 분이시기 때문에"라고 했고, 조희연 서울교육감은 "자신에 대해 가혹하고 엄격한 그대"라고 했다.

12일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 마련된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 분향소에서 조문하려는 시민들이 줄을 서고 있다. 박 시장 발인식은 13일 오전 서울대병원에서 진행되며, 서울시청 앞에서 열리는 영결식은 온라인으로 생중계된다. 서울시에 따르면 이날 오후 10시 기준 추모객 2만382명이 분향소를 다녀갔다.

반대 진영에서는 도를 넘는 박 시장 조롱이 잇달았다. 유튜브 채널 '가로세로연구소' 진행자들은 지난 10일 박 시장이 극단적 선택을 한 북악산 현장을 찾아 "(극단적 선택 도구가) 넥타이라면 에르메스 넥타이를 매셨겠네요"라는 발언을 주고받으며 크게 웃었다. 또 다른 유튜버는 11일 박 시장의 분향소가 차려진 서울광장 앞에서 '몽키매직'이라는 노래를 틀어놓고 바나나를 들고 춤을 췄다.

김중백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편 가르는 성향이 고인이나 피해자에 대한 무분별한 공격으로 나타나고 있다"며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두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박원순 시장의 죽음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은 사망 확인 당일 아침 서울시가 '서울특별시장(葬)'을 치르겠다고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의혹에는 눈감은 일방적 미화와 그로 인한 2차 가해'→'그에 대한 반발'→'반발에 대한 반발'의 양상으로 흘러가며 극단으로 치달은 것이다.

12일 서울광장에 마련된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 분향소에서 한 시민이 박 시장의 성추행 의혹을 규탄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서울시 발표 직후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라온 '박원순씨 장례를 5일장, 서울특별시장으로 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청원은 하루 만에 20만 동의를 넘겼고, 12일 오후 10시까지 55만명이 넘는 사람이 동의했다.

반대쪽에선 '고 박원순 서울특별시장님의 정중한 장례를 요구한다'는 반박 청원을 올렸다. 청원인은 "유달리 성 도덕에 민감한 대한민국"이라며 "설사 피해자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가 서울시장으로 이룩한 업적까지 상쇄될 수 있을까요? 마지막 가는 길까지 진흙탕길로 만들어야 되겠습니까?"라고 썼다. 이 청원에도 2만4000명이 동의했다.

죽음 앞에서조차 그악스러워진 한국인의 자화상은 백선엽 장군 별세 소식에서도 똑같이 나타났다. 좌파 성향 '군인권센터'라는 단체는 12일 성명에서 "백씨가 갈 곳은 현충원이 아니라 야스쿠니신사"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상대를 깎아내림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고자 하는 심리에서 비롯된 일종의 반사회성이라고 분석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치료학과 교수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고인이나 피해자를 공격해 자신의 정당성을 찾으려는 심리"라면서 "사회가 이들의 반사회적인 행동에 제동을 걸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가 성숙한 시민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고인에 대한 애도와 더불어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한 진실 규명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