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덕 웨스틴조선호텔서울 조리팀장

"남편이 요리사이니 손에 물 묻힐 일 없겠네?"

간혹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아내는 억울할 것이다.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내겐 직업병이 하나 있다. 의학계에 아직 보고되지 않은 병이라 직접 작명했다. 이름하여 '주방 정돈병'. 주방이 완벽하게 정돈돼 있지 않으면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오래전 내가 딱 한 번 아내의 냉장고를 침범한 적이 있다. 아내가 외출한 틈을 타 냉장고 정리를 전격 감행했다.

호텔 주방에서처럼 유통기한이 촉박하거나 상태가 모호한 식재료들을 과감하게 버렸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식재료 수납 배치 시스템을 적용했다. 완벽하게 정돈된 냉장고와 수납공간을 보면서 아내의 칭찬을 받는 행복한 상상을 펼쳤다. 하지만 돌아와 부엌을 본 아내는 화를 냈다. 배치가 달라져 불편하다는 것이다. 속이 상했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다. 나는 아내의 영역을 존중하지 않았고, 아내만의 체계를 무시했던 것이다.

미식과 탐식을 가르는 기준에도 '존중'이 있다. 탐식은 스스로를 존중하지 않는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더 귀한 것, 더 비싼 것만을 욕망한다. 음식에 극소량의 복어 독을 뿌려 먹는 사람들도 있다. 생의 마지막 음식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을 만들어 미각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미식이란 음식을 느끼는 감각만이 아니다. 그 맛을 보기 위해 달려간 시간의 밀도와 관계가 있다. 자신을 존중하는 건강한 삶의 시간이야말로 탐식과 미식을 가르는 중요한 요소다. 탐식이 그저 혀끝의 감각에만 충실한 것이라면, 미식은 내 삶의 시간으로 빚어내야 하는 공감각이다.

자택 부엌 무단 침공 사건 이후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진정한 미식을 구현하는 존재는 아내와 같은 주부라는 점이다. 그들은 '사랑과 생명'을 재료로 쓰는 요리사들이다. 난 매일매일 이 존중의 음식을 만드는 주부들을 '위대한 아마추어'라 부른다. 나 같은 프로 요리사들은 감히 그 위대함에 대적할 수 없다. 주부들 앞에서 나는 영원한 '주방 보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