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우릴 버렸다.'

정체 모를 바이러스의 창궐로 폐허로 전락한 서울 도심의 아스팔트 위에는 절망으로 가득한 절규가 뚜렷한 흰색 페인트로 적혀 있다. 15일 개봉하는 영화 '반도'(감독 연상호)는 2016년 1100만 관객을 동원한 '부산행'의 4년 후 이야기를 담은 속편. 도로 위 강렬한 문구가 보여주듯 전작(前作)보다 훨씬 더 암울하고 처절한 상황으로 관객들을 던져 넣는다.

'반도'에서 전직 대위 정석(강동원)은 폐허로 전락한 서울에 일확천금의 기회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4년 만에 다시 홍콩에서 한국으로 들어간다.

전작 '부산행'에서 살아 있는 시체인 좀비들이 어둠에 둔감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차량 전조등과 경적, 조명탄과 기관총까지 빛과 소리를 총동원해서 어둠 속에서도 좀비들을 깨워낸다. 당연히 등장인물들은 쉴 틈 없이 피곤하고 처절한 생존 투쟁을 벌여야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시대에 바이러스로 인한 몰락을 다룬 문제작이 탄생한 셈이다.

속편의 장점은 구구절절하게 전작의 상황을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부산행'이 질주하는 고속철도에 올라탄 탑승객들을 통해서 서서히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보여줬다면, 이번 '반도'는 '몰락 이후(post apocalypse)'의 한반도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한국은 정부 기능이 마비된 채 고립무원의 땅으로 전락했고, 지금은 그저 '반도'라고 불릴 뿐이다. 해상 탈출에 성공한 생존자들은 난민 인정도 받지 못한 채 불법 체류자 신세로 홍콩의 밤거리를 전전한다. 2000만달러의 현금이 실린 트럭이 서울 목동의 도로에 방치돼 있다는 소문을 접한 전직 대위 정석(강동원) 일행은 일확천금을 꿈꾸며 홍콩에서 서울로 재잠입한다.

좀비 영화의 거푸집 속에 다양한 장르의 공식을 용해시키는 감독의 영민한 전략은 이번 속편에서도 어김없이 빛난다. 폐허가 된 서울이 서부 영화의 황무지라면, 트럭을 손에 넣으려는 인간 군상은 현상금 사냥꾼과도 같다. 초반에 서부극의 재미를 녹여 넣은 뒤 곧바로 좀비와 쫓고 쫓기는 20여 분의 현란한 차량 추격전으로 영화의 속도감을 한껏 배가시킨다. 폐허가 된 서울의 밤 도심을 전후좌우로 질주하는 '좀비 차량 추격전'이야말로 영화에서 가장 창의적인 장면일 것이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처럼 몰락 이후의 세상을 묘사한 SF 영화와 '워킹 데드'와 같은 좀비물의 결합은 영화의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미안해, 이런 세상에서 살게 해서." 몰락 이전의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전직 군 간부 김 노인(권해효)은 이렇게 아이들에게 말한다. 이 대사가 보여주듯 연상호의 작품들은 '비'주류적 감수성과 '비'열한 인간 군상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 '비'관주의적 세계관이라는 세 가지 '비'에서 출발했다. 그렇기에 아비규환의 수라도에서 살아남은 인간은 좀비와 싸우고, 또다시 다른 생존자들과 처절하게 싸운다. 하지만 탈출이 봉쇄된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끝끝내 버텨 나갈 힘을 주는 것이 가족애(家族愛)라는 점도 흥미로운 공통점이다. '부산행'에서 아버지의 희생이었다면, 이번 '반도'에서는 어머니 민정(이정현)의 눈부신 모정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최근 한국 영화는 '기생충'의 눈부신 성취에도 상업주의와 비판 의식의 어색한 동거, 여성 비하와 폭력 과잉, 틀에 박힌 전개와 최루성 결말 등으로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절망과 희망의 능수능란한 변주를 통해서 그런 우려를 말끔하게 씻어냈다는 점이야말로 이번 '반도'의 유의미한 성취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설적으로 '반도'는 바이러스의 역경 속에서 힘겹게 분투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도 닮은 구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