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즈 책|폴 S 킨드스테트 지음|정향 옮김|글항아리|324쪽|1만8000원 포도주에 곁들여 부드럽고 향긋한 치즈를 먹는 것은 사소한 즐거움이겠지만, 인류가 그 즐거움을 누릴 수 있기까지 과정은 전혀 사소하지 않았다. 치즈의 발명조차 ‘인류 문명은 도전과 응전의 역사’라는 토인비적 통찰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인간 어른은 우유를 잘 소화하지 못한다. 유당을 분해하는 락타아제가 성년이 되면 위장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런 우유를 치즈로 만들어 먹으면 배앓이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낸 이는 신석기인들이다. 토기에 담긴 우유를 휘저으면 딱딱한 응유와 액체인 유청으로 분리되는데, 응유를 먹어보니 소화가 잘됐다. 이게 치즈의 시작이었다. 만약, 인류가 유당을 소화할 수 있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온갖 풍미의 치즈는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토기가 만들어지기 전인 구석기시대엔 우유를 담아 둘 그릇도 없었다. 그러니 치즈는 미숙한 소화 능력과 신석기시대 토기가 힘을 합쳐 인류에게 준 선물인 셈이다.

미국 버몬트 대학 식품영양학과 교수인 저자는 이 책에서 식품으로서 치즈가 아니라 인류 문명사의 한 축을 담당한 문화 아이콘으로서 치즈 이야기를 들려준다. 먼저 간 곳은 기원전 6500년 전 아나톨리아.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 파편에서 치즈의 흔적인 유지방이 발견됐다.

이어서 찾아간 메소포타미아에서 치즈는 영적 세계와 인간을 매개하는 음식이었다. 아브라함이 천사들에게 치즈(엉긴 젖)를 대접하는 구약 창세기 속 이야기 배경에는 아브라함이 신의 계시를 받기 전에 살았던 대도시 우르가 세계 최대 치즈 생산지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사후세계와 부활을 믿었던 고대 이집트인들도 망자가 저승에서 먹을 식량으로 치즈를 함께 묻었다.

다양한 치즈. 신석기인은 치즈가 된 굳은 우유를 먹으면 배앓이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역사와 문학에도 치즈는 다양한 흔적을 남겼다. 호메로스 서사시 '오디세이'에 나오는 외눈박이 괴물 키클롭스의 섬에도 치즈가 조연으로 등장한다. 시칠리아로 추정되는 이 섬에서 오디세우스는 키클롭스가 동굴에 갖춰 놓은 치즈 생산 시설을 발견하고 감탄한다. 이 이야기엔 호메로스가 활동하던 시절에 이미 시칠리아가 지중해 미식 문화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이 녹아있다. 로마와 카르타고가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격돌한 포에니 전쟁이 치즈의 확산이란 엉뚱한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탈리아 반도에 침입한 카르타고군이 반도의 경작지를 뭉개버려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자, 로마인들이 파종을 포기하고 양과 염소를 길렀다.

중세는 문명의 암흑기였지만, 치즈의 시각으로 보면 오히려 전성기였다. '노동이 곧 기도다'라며 근로를 강조했던 중세 베네딕토회 수사들은 수도원에서 다양한 치즈 제조 방법과 숙성 기술을 실험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즐겨 먹는 브리, 로크포르, 퐁레베크, 크로탱 등이 세상에 출현했다.

탐구와 혁신이 인간의 본성임을 증명하는 사례도 곳곳에서 만난다. 먹기 좋게 썩히되 못 먹을 만큼 썩지 않는 최적점을 찾기 위해 치즈 장인들은 수천년 머리를 싸맸다. 체더 치즈를 만드는 18세기 영국 장인들은 치즈 속 수분을 빼내기 위해 1600㎏짜리 누름돌을 개발했고, 구더기가 슬지 않으면서 일정 습도를 유지하기 위해 표면에 버터를 바르는 아이디어를 냈다.

군침을 돌게 하는 사연만 있는 것은 아니다. 17세기 이후 치즈는 노예무역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했다. 아프리카에서 미국 북부지역으로 끌려온 여성 노예가 만든 치즈가 남쪽 서인도제도에 끌려간 남성 노예의 식량으로 공급되고, 이들이 재배한 당밀로 만든 럼주는 다시 아프리카 노예를 사들이는 밑천이 됐다.

책에 등장하는 치즈 상당수가 우리에겐 낯설다는 점이 아쉽다. 한편으론, 흔한 발효음식으로 이처럼 근사한 서양문명사를 쓰는 저들의 지적 풍성함이 부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