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한보 사태가 터졌을 때다. 한보 정태수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보도된 K의원은 ‘사실무근’이라고 강력 부인했다. 하지만 이내 사실로 드러났고 검찰청 포토라인에 선 그는 당당하게 말했다. “정 회장한테 돈 받은 바 없다고 했지 한보 돈 안 받았다고 한 적 없다.” 같이 연루된 정치인은 “주위에서 십시일반(十匙一飯) 도와줬는데 그때 들어온 것을 기억해내지 못했다”고 했다. 외환 위기 시절 은행 퇴출을 막아달라는 로비 대가로 돈을 받은 정치인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퇴출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어 나도 그랬을 뿐이다. 법률가가 아니라 잘못인 줄 몰랐다.”

▶정치인은 말장난 같은 말을 할 때가 많다. 곤궁한 순간을 모면하면서도 뒷날 책잡히지 않으려다 보니 그렇다. 하지만 더 큰 비난만 부르기도 한다. 골프장 캐디를 성추행한 사람은 "손가락 끝으로 명찰을 툭 건드렸을 뿐"이라고 했다. 한 의원은 성추행 폭로에 "신체 접촉이 있었을 수 있지만 '미투' 성격은 없었다"고 했다. 동석한 사람을 성추행하고 "식당주인인 줄 알았다"고 한 정치인도 있었다. 전 부산시장은 성추행 재판에서 "혐의는 인정하는데 기억은 나지 않는다"고 했다.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가 번복한 거물급 정치인은 비난받자 이렇게 말했다. "나라의 위난을 국민께 알려야 한다고 생각해 말을 시작했더니 여러 말들이 있다. 개의치 않겠다." 백의종군하겠다고 해놓고선 비례 공천을 받은 노정치인은 노욕 비난에 물러나며 "노욕이라기보다는 야심이 있었다"고 했다.

▶조국 전 법무장관은 '말장난'의 표본 같다. 그는 "내가 정당하다 생각했던 것들이 다른 시각으로 보기엔 정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장난 같은 말로 청문회를 시작했다. 그 뒤 쏟아낸 "경제·경영을 모른다. 펀드도 몰랐다" "집안 문제에 소홀했던 아빠이자 남편"은 뒷날 말장난을 넘어선 거짓이었음이 드러났다. 한 여당 의원은 공항에서 신분증을 보여 달라는 요구에 호통치고는 "내가 갑질을 당했다"고 했다. 사기꾼을 공익제보자라고 내세운 의원은 "내가 국민 판단을 흐리게 했을 만큼 국민이 어리석지 않다"고 했다.

▶박병석 국회의장이 서울과 대전에 집이 두 채 있다는 논란이 일자 “대전 집은 ‘처분’하고 월세 살고 있다”고 했다. 다음 날 아들에게 집을 증여한 사실이 드러났다. 관리비를 내주면서 월세를 냈다고 했다. 입법부 수장인 국회의장이 국민에게 무언가를 감추려고 말장난을 했다. 최근 수년간 국회의장만큼 국민을 실망시킨 자리도 많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