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세계적 학술지 사이언스에 한국 연구팀의 논문 한 편이 실렸다. 이준희 울산과학기술원 교수 연구팀이 반도체 집적도를 1000배 이상 높여 손톱 크기에 고화질 영화 1만2000편을 저장할 수 있는 반도체 구현 가능성을 제시한 논문이었다. 사이언스에 순수 이론 논문이 게재되는 경우는 드물다.

이 연구는 삼성전자의 삼성미래기술육성사업이 지원했다. 삼성전자는 지난 2014년부터 매년 미래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 과제를 선정해 연구비를 주고 있다. 삼성미래기술육성사업은 매년 발표 때마다 지원 규모와 더불어 선정된 연구 과제가 학계와 산업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삼성전자가 수백억원의 연구비 집행을 결정하는 연구 과제들이 10~20년 뒤 한국 산업을 이끌 차세대 기술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IT(정보기술) 기업 임원은 "현재 기준으로 보면 생소한 분야가 많지만 삼성이 발표하는 투자 분야를 보면 삼성이 추구하는 미래 기술뿐 아니라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올해도 9일 양자(量子)컴퓨터, 바이오신약, 차세대 반도체 등 6개 기술 분야의 12개 연구 과제를 '삼성미래기술육성사업'으로 선정했다. 앞으로 최대 3년 동안 총 123억5000만원의 연구비를 지원한다. 회사 측은 "삼성에 필요한 것이 아닌 국가에 필요한 연구를 지원하는 사업"이라고 밝혔다.

◇미래 한국 먹여 살릴 연구 투자

올해 삼성이 주목한 미래 기술 분야는 '양자컴퓨터·반도체·바이오'로 요약할 수 있다. 이준구 카이스트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는 양자컴퓨터와 인공지능(AI) 간 융합 연구로 ICT(정보통신기술) 분야 지원 사업에 선정됐다. 현존 최고 성능의 수퍼컴퓨터보다 1억배 빠른 성능을 구현할 수 있는 양자컴퓨터를 통해 차세대 AI를 구현하는 게 목표다. 이 교수는 "양자 AI는 아직 학계에서도 적절한 지원을 받기 어려운 신규 분야"라며 "5년 정도 후에 상용화가 가능해지면 맞춤형 신약, 거대 물류 시스템 등에서 각종 난제를 풀어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정진욱 한양대 전기·생체공학부 교수는 차세대 반도체 개발에 필요한 식각(반도체 기판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냄) 기술의 권위자로 꼽힌다. 반도체 기판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원자 단위로 반도체를 가공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이 기술이 상용화되면 현재 한계에 다다른 반도체 성능을 1000~1만배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조승우 연세대 생명공학과 교수는 알츠하이머(치매) 치료제 개발을 위한 '뇌 오가노이드' 개발 연구를 하고 있다. 오가노이드는 줄기세포를 특정 장기의 세포로 자라게 해 실제 장기와 유사한 입체 구조물로 만든 것이다. 인공적으로 만든 '미니 장기(臟器)'인 셈이다. 이 밖에 반도체 소자를 수직으로 쌓아 밀도를 높이는 기술(최리노 인하대 교수), 인체 면역 세포를 이용한 이식거부반응 제어기술(양재석 서울대 교수) 등도 올해 삼성의 미래기술 지원 대상으로 선정됐다.

국제학술지 논문 발표

삼성이 지원하는 미래 원천 기술은 현재 기준으론 꿈같은 기술이거나 그 이론이 되는 기초과학이 대부분이다. 심폐소생술을 하는 로봇(서길준 서울대 교수), 긁히면 흠이 저절로 없어지는 금속(김도향 연세대 교수) 등이 대표적이다. 연구에 대한 지원 사업을 시작한 지 10년이 안 됐기 때문에 아직 상용화로 이어진 연구도 없다. 하지만 최근 들어 세계적 권위의 국제학술지에 연구 논문이 실리는 등 조금씩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삼성전자에 따르면 미래기술육성사업 지원을 받은 연구 과제를 통해 1241건의 논문이 국제학술지에 실렸다. 이 중 사이언스·네이처 등 최상의 학술지에 소개된 논문도 93건에 이른다.

2013년부터 601개 연구 과제에 총 7713억원의 연구비가 집행됐다. 연구 과제 1건당 평균 13억원이 지원됐다. 한 서울 지역 대학 교수는 "정부 지원을 받은 연구의 경우 과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1년 혹은 3년 뒤에 과제 지원을 받기가 사실상 어렵다"며 "삼성의 미래 기술 육성 사업은 실패를 용인하고 목표 달성을 강요하지 않아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