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아바(ABBA)를 기다리며
이규탁의 팝월드 <2>

이규탁 한국조지메이슨대 교수

조선닷컴 스웨덴 출신 혼성그룹 아바(ABBA)

최근 MBC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 등장한 혼성 3인조 댄스 그룹 ‘싹쓰리’가 인기다. 가수 이효리와 비, MC 유재석으로 구성된 이 프로젝트 그룹은 1990년대 복고풍의 신나는 댄스 음악의 부활을 목표로 내걸었다. 그런데 이들을 보고 있으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룰라·투투·쿨·코요태·샵처럼 1990~2000년대 인기를 끌었던 그 많은 혼성 그룹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한국 가요계에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 규정이 생긴 것도 아닐텐데, 왜 지금은 남성 그룹과 여성 그룹으로 철저하게 갈라져 있는 걸까.

조선닷컴 남매 듀엣 '악동뮤지션'

혼성 그룹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건 2000년대 후반부터다. K팝의 전성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라는 점이 무척 역설적이다. 지금은 남매 그룹인 악동뮤지션, 남성·여성 멤버 2명씩으로 구성된 4인조 혼성 아이돌 그룹인 카드(KARD) 정도가 그나마 예외에 속한다. 하지만 악동뮤지션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K팝 그룹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카드는 남미와 유럽의 인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내에서 인지도는 낮은 편이다. 과연 K팝의 부상과 혼성 그룹의 실종은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몇 가지 힌트가 있다. 우선 예전에 비해 K팝 그룹의 춤이나 무대 퍼포먼스가 한층 화려하고 강력해졌다는 점이다. K팝의 핵심적 정체성 가운데 하나인 '칼 군무'는 복잡하고 정교하게 짜여진 동선(動線)에 따라 멤버들이 완벽한 호흡을 맞추면서 움직이는 일종의 무대 예술이다. 그런데 혼성 그룹은 남녀 멤버의 개성 양쪽을 모두 살리면서 '칼 군무'에 대한 관객의 기대치까지 충족시켜야 하는 어려움을 떠안게 된다. 춤과 퍼포먼스가 중요해질수록 혼성 그룹의 입지는 줄어들게 된다.

조선닷컴 3인조 혼성 그룹 '쿨'

팬들이 K팝을 소비하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다. 쿨이나 코요태처럼 예전에 큰 인기를 누렸던 혼성 그룹들은 쉽게 친해질 수 있는 가볍고 대중적인 음악으로 젊은 세대뿐 아니라 모든 연령층의 음악팬들에게 골고루 사랑을 받았다. 이는 과거 수려한 멜로디와 가볍게 춤출 수 있는 리듬이 결합된 댄스 팝으로 세계적 인기를 누렸던 아바(Abba), 보니엠(Boney M), 에이스 오브 베이스(Ace of Base) 같은 혼성 그룹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혼성 그룹은 멤버 개인의 매력이나 카리스마보다는 음악 자체의 매력으로 승부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보니 상대적으로 멤버 개인의 인기는 크게 높지 않았다.
하지만 K팝의 인기가 본격화하면서 강력한 충성도를 지닌 탄탄한 팬층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인 성공 요소로 자리 잡았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 K팝 팬들도 특정한 그룹이나 멤버를 물심양면으로 발벗고 지원해서 글로벌 스타로 키워내는 데 기꺼이 동참한다. 이들은 팬인 동시에 손위 형제나 삼촌·이모 같은 보호자를 자처한다. K팝의 팬과 아이돌 그룹의 관계를 설명할 때마다 '양육'이나 '성장 서사(敍事)'의 개념이 빠지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획사와 아이돌 그룹도 이런 취향을 철저하게 겨냥한 음악과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K팝의 팬덤은 '유사 연애'와 '보호자' 사이의 위태로운 줄타기가 특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녀가 섞여 있는 혼성 그룹은 다른 성별의 멤버에게 우선적으로 관심을 갖고 지원하는 팬들에게는 후순위로 밀려나기 쉽다.
하지만 개성적 음악과 퍼포먼스로 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카드처럼 혼성 그룹의 성공이 반드시 불가능한 건 아니다. 빼어난 음악성과 개성을 지닌 혼성 그룹들이 더 많이 등장할수록 한국 대중음악도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한국의 '아바'가 등장할 날을 손꼽아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