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이별|레이먼드 챈들러 지음|김진준 옮김|열린책들|592쪽|1만4800원 미국 탐정소설의 대가(大家) 레이먼드 챈들러의 대표작 ‘기나긴 이별’(1953년)이 새로 번역됐다. 간결하고 냉담하게 끊어치는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의 원조로 꼽힌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최소 열두 번은 읽었다”고 한 작품이다. ‘조용한 밤이었고 집 안이 평소보다 더 휑하니 빈 듯한 느낌이 들었다. 9시 반에 전화벨이 울리더니 전에 들어본 목소리가 들려왔다’는 챈들러의 문장엔 하루키 소설의 근원이 어른거린다. 챈들러의 추리 소설 시리즈는 고독한 중년의 사립 탐정 ‘필립 말로’가 비정한 도시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모험을 통해 미국 사회의 명암(明暗)을 냉소적으로 그려냈다.

소설은 '내가 테리 레녹스를 처음 보았을 때 그는 술에 취한 채 댄서스의 테라스 앞에 세워 둔 롤스로이스 실버레이스 안에 앉아 있었다'로 시작한다. 탐정인 '나'는 우연히 만난 술꾼 레녹스를 집까지 데려다 준다. '사진이나 개인 소지품 따위는 집 안에 하나도 없다. 마치 회의나 송별회, 간단한 술자리나 대화, 혹은 성교를 위해 잠시 빌린 호텔방 같다'는 곳에서 사는 레녹스는 처음엔 알코올중독자로 등장하지만, 이내 백만장자의 딸과 결혼한 뒤 '난 이제 부자야. 행복 따위가 왜 필요해?'라며 거들먹거린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나’를 급히 찾아와 아내가 살해됐다며 도움을 청한다. 사건에 휘말린 ‘나’는 ‘경찰 노릇도 참 쉽지 않은 일이다. 누구를 짓밟고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지 어떨지 판단할 길이 없으니’라며 권력과 범죄 조직에 연루된 경찰을 조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