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도 안돼 국회에서 법 발의부터 개정까지 이뤄낸 40조원 규모 기간산업안정기금이 정작 출범한지 한달이 지났지만 신청공고 문구조차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세부 운용규정을 마련하는데 시간이 걸리고 있다”는 것이 실무기관인 산업은행의 공식 입장이지만, 실상은 까다로운 자격요건에 부합하는 기업들은 돈이 급하지 않고 한푼이 급한 기업들은 요건에 미달되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다. 기안기금만 오매불망 바라보는 기업은 없다보니, 기안기금 실무진들 역시 급하게 신청을 접수할 유인이 없어진 것이다. 40조원이라는 막대한 규모의 기금을 국민의 혈세를 들여 만들어 놓고,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이 지난 17일 온라인 기자간담회를 개최하며 마무리 발언을 하고 있다.


◇대통령까지 나선 기안기금…속전속결로 법개정까지 완료

기간산업은 한 나라 경제의 토대가 되는 산업을 말한다. 법적으로 기간산업을 명시하고 있진않지만, 한국의 경우 자동차업종이나 조선업종처럼 고용된 노동자가 많고 협력사들도 무수히 많은 업종을 의미한다. 또한 철도, 해운, 항공 등 주요 운수산업도 기간산업에 포함시킨다. 유사시 이 업종은 안보와도 직결되는 역할을 해내기 때문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사태로 항공업 등 기간산업에 속하는 업종 기업들의 경제사정이 악화될 가능성이 커지자 정부는 4월 22일 기간산업안정기금 계획을 발표했다. 기간산업이 타격을 받으면 다른산업까지 연쇄 충격을 줘 시장경제에 큰 파장을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면서 항공·해운·자동차·조선·기계·전력·통신 등 7개 업종을 선정했다. 그러다 최종적으로는 자금이 급할 것으로 예상되는 항공·해운업종만 명시하고, 나머지 기업은 필요에 따라 추가하기로 했다.

산업은행에 이 기금을 설치하기 위해선 국회에서 법 개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까지 나서 국회에 법개정 협조를 촉구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당시 “정부는 기간산업안정기금을 통해 기간산업이 쓰러지는 것을 막겠다”며 “기간산업을 보호하고 국민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입법에 국회도 협조해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 덕분에 정부 발표가 나온지 일주일만에 법개정안은 국회 본회의까지 통과했고, 5월 28일 기간산업안정기금이 출범했다.

◇産銀 “실기하는일 없다”지만…수혜대상 기업들은 “글쎄”

정부는 5월 20일 기안기금 운용방안을 발표하면서 6월초엔 기업들의 신청을 접수한 뒤 집행까지 완료하겠다고 밝혔다. 은성수 금융위원장 역시 “(기안기금) 지원을 받는 첫 기업은 5월말이나 6월초에 나올 것”이라고 수 차례 언급했다. 그러나 기금을 운용하고 관리할 운용심의위원들을 선정해 5월 28일부터 매주 목요일마다 회의를 열고 있지만 한 달째 신청공고문조차 발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25일에도 5차 심의운용위원회가 열렸지만 세부 운용방안을 확정짓지 못했다. 최대현 산업은행 부행장은 17일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지원 받을 수 있는 곳은) 어느정도 규모가 있는 기업들이기 때문에 이미 (자금지원 규모와 시기를) 검토한 기업들이 많다”며 “우리가 실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첫 수혜기업으로 지목돼 온 대한항공이 정작 돈이 급하지 않기 때문에 접수 공고가 미뤄지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산업은행은 대한항공에 연말까지 8000억원 가량을 추가로 지원할 예정이었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상반기에 급한 불은 껐고 유상증자도 준비하고 있어서 지금 당장 현금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며 “업황이 좋아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기안기금 지원은 받아야하겠지만 급하게 받을 필요는 없어졌다”고 밝혔다. 2호 수혜기업으로 지목돼온 HMM(현대상선)은 이미 산업은행 관리하에서 충분히 자금 지원을 받고 있는데다, 올해 1분기엔 손실폭도 줄어 당장 기안기금을 신청하진 않을 예정이다.

재계 관계자는 “정부 입장에선 야심차게 준비한 기안기금 첫 수혜기업으로 이름있는 곳을 지원하고 싶겠지만, 기업은 기안기금 지원을 받았다는 ‘주홍글씨’가 부담스러울 것”이라며 “가능하면 최대한 기안기금에 손벌리지 않고 버티려고 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만 바라보는 LCC, 쌍용차…정작 돈 필요한 곳은 배제

자금난을 호소하는 기업들은 기안기금 지원대상 요건에 부합하지 않아 사각지대에 놓였다. 기안기금 지원대상 요건은 총차입금이 5000억원, 근로자수는 300명 이상으로 국민경제와 고용안정에 영향이 큰 기업이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항공업종 중 올해 코로나 사태에 직격탄을 맞은 저비용항공사(LCC) 대부분은 요건에 충족하지 못한다. 요건을 충족하는 LCC는 제주항공과 에어부산 뿐이다. 대형 항공사 중에선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대상이지만, 아시아나항공은 현재 M&A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배제됐다.

여기에 코로나 사태로 매출감소 등 경영상 어려움에 직면한 기업이라는 것이 입증돼야 한다. 즉 코로나 사태 이전부터 부실이 발생한 기업은 기금 지원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 기안기금 신청을 고려했던 쌍용차는 이 조건에 의해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 쌍용차는 13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하는 등 코로나 사태 이전부터 경영난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기안기금 신청을 검토 중인 해운사들도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국내 150여 해운사 중 기안기금의 차입금과 고용인원 요건에 충족하는 곳은 10여곳에 불과하다. 이 중 2~3곳이 기안기금 신청을 검토 중이지만 세 번째 조건인 코로나 사태로 실적이 줄었다는 점을 입증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문제다. 올해 상반기 유가가 하락해 해운사들 입장에선 비용이 줄었고, 수년째 불황을 겪으며 선복량도 줄여놓은 덕분에 코로나 사태 속에서도 국내 대형해운사들은 실적면에선 선방을 했기 때문이다. 선주협회는 이 같은 상황을 산업은행에 전하며 기안기금 신청요건 완화 등을 요구하고 있다.

◇예외조항있어도 여전히 높은벽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정부도 예외조건을 마련해놓긴 했다. 기금지원을 받지 못하면 핵심 기술을 보호하기 어렵고, 산업생태계 유지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입증받아야 한다. 기금을 활용해 만든 ‘협력업체 지원 특화프로그램’을 이용할 수도 있지만, 이 역시 일정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19일 정부는 기안기금에서 1조원을 출자해 특수목적기구(SPV)를 설치해, 이 기구를 통해 중견·중소 협력업체들에 자금을 지원해준다고 했다. 이 프로그램 역시 원청기업과 협업해 산업생태계 유지를 위해 필수적이라는 협력업체라는 것이 입증돼야 한다. 여기에 기존채무 연체, 세금체납 등 코로나 사태 이전부터 구조적 취약요인이 있던 기업은 제외됐다. 더구나 자금용도는 신규 운영자금으로, 기존 은행권 대출상환 용도로는 활용을 금지하는 등 사용처도 제한돼있다.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기준을 완화해 문턱을 낮춰 기간산업내 어려운 기업들이 수혜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한다”며 “즉 지원조차 하지 못하게 막아두기보단 운용심의위원회에서 여러 기업들을 두고 판단해볼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