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호 전투 참전 용사 헨리 셰이퍼씨가 작년 9월 방한해 인터뷰하는 모습. 셰이퍼씨는 “두 다리와 팔 하나를 잃었지만, 그래도 난 행운아”라고 했다.

"두 다리와 팔 하나를 잃었지만, 그래도 난 행운아(lucky one)입니다."

미 10군단 예하 해병 1사단 소속으로 장진호 전투 최전선에 섰던 헨리 셰이퍼(Henry Schafer·90)씨는 24일 본지와 전화 인터뷰에서 "지금도 70년 전 참혹했던 그날을 선명하게 기억한다"고 말했다. 1950년 12월 1일, 중공군의 기관단총에서 발사된 총알이 철수 명령을 받고 퇴각하던 그의 몸 네 군데를 관통했다. 지프에 타고 있던 동료에게 기적적으로 발견됐다는 그는 일본으로 옮겨져 10개월간 13번의 수술을 받았다. 의사는 "살아남은 게 기적"이라고 했다. 오른쪽 팔다리를 절단했고 동상 후유증으로 왼발의 일부분도 쓰지 못하게 됐다. 그런데도 노병(老兵)은 "살아 돌아가고 싶다는 말이 사치였을 만큼 너무나 많은 전우가 희생됐다. 오히려 미안했다"고 했다.

미국 해병대는 '장진호 전투(1950년 11월 26일~12월 13일)'를 사상 최악의 전투로 기록하고 있다. 미군 병력의 10배나 되는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는 과정에서 2500명이 전사했고, 8000명이 동상(凍傷)을 입는 등 1만8000명 가까운 사상자가 났다. 도처에 매복하고 있던 중공군의 공격으로 1㎞를 이동하는 데 3시간이 넘게 걸렸다.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는 "진주만 이후 미군 최악의 패전"이라고 했다.

셰이퍼씨는 "영하 30도에 육박하는 살을 에는 추위가 중공군보다 무서운 적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수통의 물과 전투 식량, 치료용 수혈관·모르핀까지 모두 얼어붙었다"며 "(동상 걸린 발 때문에) 군화를 벗을 땐 여기저기서 고통의 신음이 쏟아졌다"고 했다. "수류탄은 불발되기 일쑤였고, 기관총까지 얼어 먹통이 된 경우가 많았다"고도 했다.

하지만 셰이퍼씨는 "장진호 전투는 나에게 자랑스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다"며 "우리는 값진 희생을 했다"고 했다. 장진호에서 미군이 버틴 덕분에 피란민 20만명을 구출시킨 '흥남 철수 작전'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장진호 전투 생존자는 그 수가 워낙 적어 미국에선 'Chosin Few'라고 불린다. 'Chosin'은 장진(長津)의 일본어 발음을 영어로 표기한 것이고, 살아남은 사람이 몇 안 된다 하여 'Few'라는 단어가 붙었다. 셰이퍼씨는 "이제 내 주위에 장진호 용사들은 모두 다 저세상으로 갔다. 다 떠나고 나만 남았다"고 했다.

그는 "전쟁이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고 했다. 엔지니어를 꿈꿨던 그는 팔다리를 절단하면서 수학 교사로 34년 일했다. 그는 "덤으로 주어진 삶이라 생각하니 인생을 대하는 관점도 긍정적으로 변했다"고 했다.

워싱턴주 시애틀 근교의 한 작은 도시에 살고 있는 셰이퍼씨는 "아내와 함께 한국 뉴스를 보는 것이 취미"라며 "최근 풍선과 대남 전단을 두고 벌어지는 남북한의 실랑이를 관심 있게 보고 있다"고 했다. 노병은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는 걸 보는 게 내 마지막 소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