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수 논설위원

30년 기자 생활 중 시민 의식 면에서 필자를 가장 놀라게 한 나라는 노르웨이다. 2011년 7월 오슬로 시청 앞 광장에서 지켜본 테러 희생자 추모제가 지금도 생생하다. 시민 15만명이 장미 한 송이씩 들고 나와 이민자 수용 정책에 불만을 품은 사이코 테러리스트의 무차별 총격에 목숨을 잃은 청소년 희생자 69명을 추모했다. 몇 시간 동안 고함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시민들은 만행에 대한 분노, 늑장 출동으로 피해를 키운 경찰에 대한 원망 대신 평화와 관용을 염원했다. 왕세자와 총리가 연단에 나와 국민 화합을 호소하면 공감한다는 뜻으로 장미꽃을 흔들 뿐이었다. 시민들은 추모제가 끝나자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며 도시 전체를 장미 정원으로 만들었다. 경찰관에게도 꽃을 건네고, 정부 청사 담장에도 꽃을 꽂았다. '이런 수준의 시민 의식은 어떻게 가능하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노르웨이는 북해 유전 덕에 국부펀드에 1조1400억달러(국민 1인당 2억8000만원꼴)를 쌓아두고 있다. 시민들은 소득의 40%를 세금으로 내면서도 현 세대의 국부펀드 인출 한도를 총액의 3% 이내로 묶어놨다. 국부펀드 20년 연평균 수익률이 6%대인 점을 감안하면 매년 발생하는 수익금의 절반만 쓰고, 나머지 수익과 원금은 미래 세대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다. 세대를 아우르는 연대 의식이 있어야 가능한 선택이다.

스위스 국민 수준도 만만치 않다. 올림픽위원회(IOC) 본부가 있는 로잔을 방문했을 때 개찰구도, 역무원도 없는 지하철이 인상적이었다. 무임승차를 막을 장치가 아무것도 없었지만 시민들은 다들 돈을 내고 지하철을 이용했다. 이런 시민들이 매달 300만원씩 기본소득을 공짜로 주겠다는 정책 제안에 77%가 반대표를 던졌다.

10여년 전 특파원 시절 경험한 프랑스의 민도(民度)도 선진국이라 할 만했다. 프랑스에선 유치원에서 고교까지 학부모 소득수준에 따라 다른 급식비를 받는다. 학부모가 구청에 소득 증빙 서류를 제출해 등급 판정을 받는데, 일정 수준 이하는 공짜이고, 고소득자는 한 끼에 1만원 이상 비싼 밥값을 내야 한다. 대다수가 정직하게 신고하지 않고는 유지될 수 없는 제도인데, 수십년째 잘 굴러가고 있다.

코로나 K방역 찬사에 고무돼 우리 스스로 선진국 시민이란 자기도취에 빠진 것 같다. 과도한 자긍심이 K복지 담론으로 이어지며 기본소득, 전 국민 고용보험 같은, 선진국도 엄두를 못 내는 급진적 보편 복지를 도입하자고 한다. 재원 문제는 둘째치고, 과연 우리가 이런 제도에 걸맞은 시민 의식을 갖추고 있을까.

특파원 시절 가짜 소득 증빙 서류로 공짜 점심 판정 받은 걸 무용담인 양 자랑하는 동포를 여럿 보았다. 그새 개선됐다 할 수 있을까. 최고 엘리트 출신 조국 전 법무장관 부부는 자녀를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시키기 위해 온갖 꼼수를 동원했다. 극소수의 일탈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코로나 최대 피해 지역 대구에선 공무원, 교직원, 공기업 직원 3900여 명이 저소득층에게 가야 할 지자체 재난지원금을 챙겼다가 들통났다. 의료비를 십시일반(十匙一飯)하자고 만든 실손보험에선 보험 가입자의 도덕적 해이 탓에 손해율이 130%를 웃돈다. 선진 복지는 기본 양식을 갖춘 시민들이 연대 의식을 발휘할 때 지속 가능하다. 전국 모든 가구에 코로나 재난지원금 14조원을 뿌렸는데 기부액은 0.2%에 불과하다. 근로자 40%가 소득세를 한 푼도 안 내는데, 세금으로 기본소득을 주자는 주장엔 국민 절반이 찬성한다. 공짜 점심 좋아하고 연대 의식 희박한 시민들을 선진 복지 제도가 감당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