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글을 올리기 전 중대장과 대대장에게 먼저 보고하라."

19일 오후 강원도 홍천의 한 육군 부대 강당에선 병사 80여 명을 상대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사용법' 교육이 열렸다. 이달 중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을 통해 '공군 일병 황제 군 복무' '육군 여단장의 욕설·인격모독 고발' 등 군 비위가 잇따라 폭로되자 기강 확립 차원에서 실시한 특별 교육이었다. 교육을 들은 A(21) 상병은 "청원 게시판에 올리면 최상급 기관인 육군 본부가 직접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인식이 장병 사이에 퍼져 있다"며 "부대가 뒤집히는 건 나중 일 아니겠느냐"고 했다.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각종 군 관련 비위가 실제 감사(監査)까지 이어지면서, 폭로 가능성이 있는 병사와 사전에 입단속하려는 지휘부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 일각에선 '군 기강 해이' 우려는 물론 "이제는 병사가 상관을 직위해제시킬 수 있는 시대"라는 말까지 나온다. 부대의 사건·사고를 축소·은폐해온 군의 오랜 행태가 빚어낸 불신 탓도 있다는 지적이다.

일선 군부대 내 '청원 게시판 주의보'는 지난 11일 발생한 '기업 부회장 아들 황제 병역' 논란에서 출발했다. 한 공군 병사가 기업 부회장인 아버지의 지위를 이용해 자신의 빨래를 부사관에게 시키는 등 편한 군 생활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문제의 부회장은 사과문을 발표하고 사퇴했다. 감찰을 받은 해당 부대에 대해선 군사 경찰이 수사 중이다. 지난 16일에는 자신을 육군 제1공병여단 소속 일병이라 밝힌 청원 게시자가 "화생방 보호의를 입는 훈련 도중 여단장에게 '일병 ×끼가 태도가 왜 그러느냐'는 폭언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육군 본부는 이틀 뒤인 지난 18일 감사에 착수했다.

군 안팎에서는 청원 게시판 등을 통한 외부 고발 문화가 기강 해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한 육군 대위는 "병사에겐 사회에 직보(直報)할 수 있는 무기가 생긴 셈"이라며 "간부 사이에선 꼬투리가 잡힐까 봐 병사에게 강하게 이야기하지 못한다는 불만이 이어진다"고 했다.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은 군 내부 사정이 곧바로 외부에 공개되는 데 대한 우려도 있다. 한만민 동강대 군사학과 교수(예비역 소령)는 "병사들은 군 기밀 관련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하기 때문에, 무분별한 외부 고발은 보안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부대 사건·사고를 축소·은폐하는 군의 부조리가 청원 게시판을 통한 고발 문화를 만들어냈다는 주장도 있다. 한 육군부대에 근무하는 B(20) 일병은 "고발 기능을 하는 소원수리함에 글을 적어내면 누가 써냈는지 역(逆)추적해 혼내지 않느냐"며 "청원 게시판이 파급력이 크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했다. 강원도 인제에 근무하는 육군 C(21) 상병은 "사건을 축소하거나 흐지부지 넘어가는 군대 문화 때문에 저 같은 신세대 장병은 청와대 게시판을 기웃거린다"고 했다. 신종우 한국국방안보포럼 선임분석관(예비역 중령)은 "과거에는 통로가 없어 묻혀 있던 군 내부 비위가 휴대폰 사용을 계기로 외부로 터져 나오는 것"이라며 "어떤 경우에도 기강 해이와 보안 유출 가능성은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