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봤을 때와 비교하면 김성민(58) 자유북한방송 대표의 몸집은 부풀려진 것 같았다. 그는 “항암제 부작용인데 지금은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폐암 4기다. 암 투병 중인 그가 소위 '특종(特種)'을 했다. 대북 전단 비방 담화를 낸 김여정이 '당중앙(후계자)이 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공개한 것이다. 북한 노동신문에 '당중앙' 표현이 나오기 전이었다.

"지난달 24일 노동당 중앙군사위 확대회의가 열렸다. 사흘 뒤 평양의 고급 정보원이 '김여정을 당중앙이나 친근한 당중앙으로 부르기로 한 선전선동부의 방침이 있었다'고 전해왔다. 그는 '2차 7개년 경제발전계획(2016~2022년)'과 평양주민등록자료 등을 인편으로 보내준 적 있는 믿을 만한 정보원이다."

김여정을 띄우는 작업

―얼마 전 노동신문에서 '당중앙' 표현이 쓰였지만, 김여정이라고 명시하지는 않았는데?

"과거에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식 발표되기 전에 '당중앙'이라는 말이 처음 나오자 일반 주민들은 헷갈려했다. '당중앙'을 김일성으로 여겼다. 하지만 문화예술인들은 김정일을 지칭하는 걸 이미 알았다. 시·소설·영화·노래로 먼저 선전하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본인이 직접 겪어본 건가?

"내가 군(軍) 선전대 작가를 할 때다. 김일성 수령 치하에서 김정일을 '최고사령관'으로 호칭할 수 없지만, 군에서는 '최고사령관 동지를 옹호합니다'라는 노래가 만들어졌다. 이런 노래가 불리자 김일성이 김정일의 '최고사령관' 호칭을 허용했다. 지금 선전선동부 작가들은 김여정을 띄우는 작업을 하고 있을 것이다."

―김정은은 30대 중반인데, 그 여동생을 후계자로 내정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지난 4월 김정은이 보름 넘게 안 나타난 것은 신병 이상 때문으로 본다. 그 기간에 후계 대책을 세운 것 같다."

―당시 태영호나 지성호 의원이 이런 발언을 했다가 김정은이 멀쩡하게 다시 등장해 여론의 뭇매를 맞았는데?

"나처럼 암에 걸려도 활동할 수는 있다."

―이는 근거 없는 추측 아닌가?

"김여정이 대남 담화를 내자, 잇따라 이를 인용한 성명과 기고문이 나오고 전국에서 궐기대회가 진행됐다. 노동당 통일전선부는 '대남사업을 총괄하는 김여정의 담화 내용을 집행하기 위한 검토 사업 지시를 내렸다'고 했다. 북한 체제에서 '지시' '교시'는 최고지도자 한 명만 할 수 있다. 김여정을 슬그머니 수령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다."

김성민 대표는 “김여정이 나서서 대북 전단 문제를 꺼낸 데는 다각적 포석이 깔려있다”고 말했다.

―북한은 공산국가이면서 봉건적 전체주의 성격이 강하다. 김여정은 꽃다발을 대신 받아주고 재떨이를 받쳐주던 비서 격이었다. 북한 주민들이 이런 김여정을 후계자로 받아들이겠나?

"북한 주민들의 정서로 안 맞겠지만, 김정은이 하겠다면 하는 것이다.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방문했을 때 한국에서 워낙 떠받들어 김여정을 크게 키워놓았다. 재떨이까지 들고 있었다는 것은 오히려 최고지도자에 대한 충성심으로 선전될 것이다. 바깥에서 생각하는 것과 같은 반발은 없을 것이다."

―김여정의 담화가 있은 뒤 통일부에서는 남북교류협력법을 적용해 대북 전단을 날려온 두 단체를 고발하려 했고, '군과 경찰을 동원해 막아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여당에서는 원천적으로 대북 전단을 막는 법을 제정하겠다는데?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나. 이는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와 정면 배치된다. 대북 전단은 외부 정보를 유입시켜 북한 주민들의 의식 변화를 이뤄내려는 것이었다."

―현 정부나 친여 세력은 대북 전단이 남북 간 긴장을 조성하고 접경지역 주민 안전에 위협이 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2011년 북한은 전단을 날리는 임진각을 조준 격파하겠다고 위협한 적 있는데?

"과거에는 임진각 등에서 대북 전단을 날리는 퍼포먼스를 했지만, 지금은 시간과 장소를 알리지 않는다. 그럴 경우 어디서 날렸는지를 북한이 알 수 없다. 접경지역 주민 안전 문제를 내세우는 것은 북한 주장에 편승한 것이다."

―노무현 정권은 '비닐 풍선에 자격증 없이 수소를 넣는 것은 고압가스안전관리법 위반'으로 대북 전단을 막으려고 했는데?

"대북 전단 활동가들은 이 때문에 고압가스를 다루는 자격증을 땄다. 노무현 정부부터 북한의 압박에 계속 밀려온 것이다. 북한에서 하지 말라면 안 하는 흉내를 내거나 조치를 취해왔다."

―갑자기 모든 남북 관계를 끊을 정도로 대북 전단이 이렇게 난리 칠 사안이었나?

"대북 전단은 과거에도 날려왔다. 지금 와서 대북 전단이 갑자기 북한 체제를 더 위협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김여정이 나서서 대북 전단 문제를 꺼낸 데는 다각적 포석이 깔려 있다."

―다각적 포석이라면?

"한국과 미국에 대해 누적된 불만을 대북 전단으로 터뜨린 것이다. 또 다른 숨은 의도는 후계 구도와 관련 있다. 이게 보다 핵심일 것이다. 지금 상황을 김여정을 부각시킬 기회로 판단한 것 같다. 대북 전단 관련 담화는 김여정의 첫 대외 사업이었다."

열차 화장실을 통해 탈출

―김여정을 후계자로 부각시키기 위해 이런 상황을 만들고 있다는 건가?

"후계자가 되려면 업적이 있어야 한다. 북한은 대북 전단 문제에서 승산이 있다고 본 것이다. 담화 발표 4시간 만에 문재인 정부에서 '대북 전단을 막겠다'고 반응했으니 실제로 먹혀든 셈이다. 북한 주민들의 대남 적개심을 끌어올려 내부 결집 효과도 거뒀다. 이를 김여정의 업적으로 부각시킬 수 있는 것이다."

―문재인 정권은 북한 입장을 가장 잘 대변해왔지만 북한으로부터 "국수 처먹을 때는 요사 떨더니…"라는 심한 모욕까지 받았다.

"북한으로서는 대화해봐도 실질적인 이익이 없었다. 문재인 정권과의 관계를 종결지으려고 한다. 대신 미국과의 직접 거래를 원하고 있다. 대북 전단, 연락사무소 폐지, 군사 합의 폐기, 대적(對敵) 관계 등의 카드로 대선을 앞둔 트럼프를 압박해 뭔가 얻어내려는 것이다."

―화제를 당신의 개인 스토리로 옮기자. 부친은 북한의 저명 시인 김순석(1921~1974)이라고 했나?

"아버지는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교수로도 있었다. 내가 열두 살 때 돌아가셨고 이듬해 어머니도 여의었다. 나는 사병으로 군에 입대해 10년 넘게 근무했다. 제대 후 평양 김형직사범대학 작가양성반에 들어갔다. 3년간 교육을 마친 뒤 장교로 임관해 예술선전대 작가로 활동했다."

―왜 탈북하게 됐나?

"어떤 사건으로 모함을 받았다. 작가로서 너무 치욕을 겪었다. 설명하면 길지만 그게 탈북 계기다. 하지만 나는 두만강 국경에서 '강을 건너면 정말 조국의 배신자가 된다'며 사흘간 갈등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강을 건넜다. 그런데 중국 변경 마을에 들어서자 방금까지 나를 괴롭히던 갈등은 다 잊혔다."

―무슨 일이 있었나?

"길거리 수레에서 바나나를 쌓아놓고 파는 걸 보고 충격받았다. 바나나를 직접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귀한' 바나나가 중국의 변경 마을에도 있었으니…, '우리식 사회주의가 최고라고 했는데 그동안 속았구나' 하는 허탈감이 들었다."

그는 톈진항에서 한국행 석탄 화물선에 올라타려다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 중국 감옥에서 49일을 갇힌 뒤 북한에 넘겨졌다. 현역 장교 신분의 탈북자여서 공개 처형이 예정돼 있었다. 양손에 수갑을 찬 채 황해도 신계에 있는 자대(自隊)로 이송됐다. 열차로 사흘간 거리였다. 그 과정에서 그는 열차 화장실의 유리창을 통해 도주했다. 다시 두만강을 건너 1999년 탈출에 성공했다.

―2004년 최초 민간 대북방송인 자유북한방송을 설립했는데?

"2003년 어느 날 탈북자 친구들과 점심을 먹다가 '남북 정상회담 후속 조치로 대북방송과 확성기, 전단 살포를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는 TV 뉴스를 보게 됐다. 그 자리에서 '외부 정보를 북한에 넣어주는 것이 정말 중요한데 우리라도 하자'는 말이 나왔다. 당시 나는 '남북의 창' '출발 동서남북' 같은 TV 프로에 출연하고 있었다. 친구들이 '방송을 해본 네가 맡아라'고 종용했다. 얼떨결에 떠밀려 방송국을 시작했던 셈이다. 주파수를 어디서 배정받고 전파를 어떻게 송출하는지도 몰랐다."

―민간 대북방송을 시작하자, 북한 정권에서 '조국을 반역한 탈북자들이 방송하는 것을 용서치 말아야 한다. 지구 끝까지 쫓아가 처단해야 한다'라고 반응했는데?

"나를 대놓고 표적으로 삼자 정말 불안했다. 길을 나서면 누가 내 뒤를 따라오는 것 같았다. 한총련 통일선봉대 소속 대학생들이 방송국에 몰려왔을 때는 '이들이 정말 장군님의 지령을 받았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 사회에서 좀 더 개인을 위한 삶을 살 수도 있었는데?

"이런 열정으로 북한 음식점을 했으면 잘살았을 것이라는 말도 들었다. 지금과 같은 삶은 우연히, 어쩌다 보니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진짜 덤으로 사는 것

그는 2017년 몸에 이상을 느꼈고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종양 제거 수술을 받고 퇴원하자,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조직 검사 결과를 보니 폐에 전이됐다는 것이다. 수술이 불가능한 폐암 4기였다.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항암제 치료를 받았지만 부작용으로 너무 힘들었다. 퇴원해 죽음을 맞기로 했다. 그때 어떤 의사분이 차세대 항암제를 소개해줬다. 한 번에 700만원이어서 한 번 맞고는 엄두를 못 냈는데, 그 뒤 의료보험 적용이 됐다. 작년 말 그 항암제가 다시 의료보험에서 제외됐다. 보험 적용이 될 때까지 기다려보는 중이다."

―투병 1년 반 만에 활동도 재개했는데?

“북한에서 탈출하면서 이미 죽음을 한 번 겪었다.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암에 걸리고 보니 ‘그때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지금부터가 진짜 덤으로 사는 것’이 됐다. 얼마가 될지 모르나 내게 주어진 삶을 의미 있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