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오후 3시 아이돌그룹 슈퍼주니어의 콘서트 '비욘드 더 슈퍼쇼'가 열렸다. 관중석은 텅 비었지만, 무대 주변 전광판에는 100여 나라에서 유료로 온라인 관람하는 12만3000여 명의 모습이 빼곡하게 비쳤다. 슈퍼주니어 멤버 신동씨는 "이 정도면 디지털의 끝인 것 같다"고 했다. 연예기획사 SM엔터테인먼트가 시도한 '세계 최초 디지털 공연'이다. 예전처럼 공연 실황(實況)을 중계하는 게 아니라, 오직 비(非)대면 관객만을 위한 공연이다. 테크 기업인 네이버와 SK텔레콤이 이 공연의 전 세계 송출은 물론이고 화려한 가상 무대를 만드는 AR(증강현실)·VR(가상현실)·3D(입체) 기술을 지원했다. 한국의 최고(最高) 연예기획사와 테크 기업이 선보인 '포스트 코로나(Post Corona)의 새 공연 방식'이다.

(사진 위)지난달 31일 아이돌그룹 슈퍼주니어의 비대면 유료 콘서트에서 증강현실(AR) 기술로 제작한 멤버 최시원씨가 등장한 모습. (사진 아래)지난달 10일 아이돌그룹 NCT드림이 온라인 콘서트에서 전 세계 팬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한국 기업이 코로나가 바꿀 신(新)인류 소비 시장을 잡기 위한 선점(先占)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자동차·전자와 같은 제조업으로 강소(强小) 부국 자리를 움켜쥔 우리나라가 이번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X·Digital Transformation) 시대의 주역 자리를 노리는 것이다. DX는 테크놀로지 혁신이 생산·판매·소비라는 삶의 방식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모두 바꾼다는 개념이다. 코로나 사태가 아날로그 세상을 한꺼번에 디지털로 바꾸는 촉매제가 된 것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국은 미·중을 제외하면 스마트폰·스마트TV·5G 등 핵심 기술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거의 유일한 나라"라고 말했다. 한국산 기기를 타고 한국 콘텐츠가 세계 소비자의 안방에 진입할 기회가 눈앞이라는 것이다.

코로나 뉴노멀을 수출하다

비(非)대면 공연은 해외 순회공연의 공식을 바꾸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다. 오는 14일엔 인기 아이돌 방탄소년단이 유료(有料) 콘서트 '방방콘 더 라이브'를 연다. 앞선 4월 무료 콘서트는 동시 접속자 224만명을 기록, 엄청난 잠재력을 입증했다. 미국 경제매체 비즈니스인사이더는 "한국 K팝 그룹의 온라인 콘서트가 주는 엄청난 경험(immersive experience)"이라며 "코로나 시대의 성공적인 공연 산업의 모습"이라고 보도했다.

세계 최대 웹툰 기업인 네이버웹툰은 최근 본사를 미국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지사였던 웹툰엔터테인먼트를 본사로, 현재 본사인 한국의 네이버웹툰을 자회사로 맞바꾸는 구조 개편이다. 예전 만화책 시장에선 미국 코믹북과 일본 망가(Manga·일본 만화)와 상대도 안 됐던 한국이지만, 디지털 만화인 웹툰(웹과 카툰의 합성어)에선 절대 강자다. 네이버웹툰이 콘텐츠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 정면 승부에 나서는 것이다.

e스포츠도 한국이 주도한다. 지난 4월 종로구의 한 빌딩에서 무관중으로 열린 '2020 롤(LoL·리그오브레전드) 챔피언스 코리아 스프링' 결승전은 전 세계 1700여만명이 시청했다. 축구의 '리오넬 메시'에 비유되는 이상혁(게임명 페이커·Faker)이 세계 최고 스타다. e스포츠 강국의 배경엔 미국·일본·중국의 틈바구니에서도 톱20 게임 업체로 성장한 엔씨소프트·넷마블·넥슨 등 한국 게임 업체가 있다. 8년 차 스타트업(벤처 초기 기업)인 센드버드(Sendbird)는 국내에선 무명(無名) 스타트업이지만 세계 기업용 메신저 시장에선 1위다. 지난 4월 전 세계 20여 나라에서 메신저 이용자 1억1000만명을 돌파했다.

하드웨어 넘어 소프트웨어에 도전

두각을 나타내는 한국형 DX 기업들은 '무한 확장의 인터넷 시대'를 최대한 활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단숨에 세계 이용자의 안방으로 직접 진입하는 방식이다. 디지털 공연에선 방탄소년단의 빅히트, 디지털 만화에선 네이버웹툰, e스포츠에선 페이커가 세계 10~20대 소비자를 사로잡고 있다. 이런 변화는 한국 수출 지형에도 드러난다. 음악이나 게임, 웹툰과 같은 콘텐츠가 TV·세탁기·냉장고 등 가전 수출을 넘어선 것이다. 작년 콘텐츠 수출은 103억3000만달러(약 12조3000억원)로, 사상 처음으로 100억달러를 돌파했다. 가전은 69억5700만달러에 그쳤다. 한국 수출 산업이 철강·자동차와 같은 경성(하드웨어) 시대를 넘어서, 연성(소프트웨어) 파워로 막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 것이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는 "세계 콘텐츠 시장은 무려 2조3912억달러로, 한국의 주력 수출 품목인 메모리 반도체(세계 시장 규모 1104억달러)의 20배 이상이다"라며 "산업화 시대엔 경성(하드웨어)인 제조업 후발 주자로 선진국을 좇아왔다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엔 연성(소프트웨어)이 우리의 수출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igital Transformation)

인공지능과 같은 테크놀로지 혁신이 생산·판매·소비라는 인간 삶의 방식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모두 바꾼다는 주장이다. 사무실·대형마트·병원 등 기존 공간을 재택근무, 온라인 쇼핑, 원격 진료와 같은 디지털 방식이 완전히 대체한다는 것이다. 스마트 팩토리와 같은 공장 혁신도 포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