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홍콩에 대한 특별지위 박탈을 추진하면서 1조달러(약 1230조원) 규모의 아시아 금융 허브 자리를 놓고 아시아 각국의 경쟁이 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미·중 갈등의 한가운데 있는 홍콩에선 최근 인재는 물론 자본까지 대이탈하는 '헥시트(Hexit)'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홍콩은 1조달러의 글로벌 투자 자금이 모여 있는 곳이다. 영국 중앙은행 영란은행에 따르면, 작년 6월 홍콩 민주화 시위 이후 6조원 넘는 펀드 자금이 홍콩을 떠났다. 국제 금융가에선 "헥시트의 헬게이트(지옥문)가 열리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홍콩에선 한 나라 두 체제를 뜻하는 '일국양제(一國兩制)' 근간이 무너질 거라는 두려움이 점점 커지고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 홍콩 법인에 근무하는 에릭 웡씨는 "일국만 존재하고 양제는 사라진 지 오래"라고 말했다.

◇금융 허브 경쟁력 상실되는 홍콩

1992년 미국 의회가 '홍콩정책법'을 제정했을 때만 해도 홍콩은 아시아에서 자유경제가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되는 곳이었다. 이 법을 통해 홍콩에 미국의 민감한 기술에 대한 접근이 허용됐고, 무엇보다 미국달러와 홍콩달러 간 자유로운 교환 등 중국 본토와 차별화된 경제무역 특권이 주어졌다. 그 결과, 오늘날 세계 100대 은행 중 70여 곳이 아시아 거점을 홍콩에 둘 정도로 글로벌 금융 허브의 경쟁력을 갖추게 됐다.

그러나 미국이 홍콩의 특별지위 철회를 공식화하고, 중국이 국가보안법 재갈마저 물리면서 홍콩의 도시 경쟁력은 크게 하락할 가능성이 커졌다. 지난 3월 영국의 글로벌 금융컨설팅그룹 Z/Yen이 세계 108개 도시 금융 경쟁력을 산정해 발표한 국제금융센터지수(GFCI)에서 홍콩은 작년보다 3계단 하락한 6위에 머물렀다. 홍콩보다 순위가 낮았던 도쿄·상하이·싱가포르는 홍콩 위로 올라섰다.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지난 1월 홍콩 신용등급을 한 단계 강등(Aa2→Aa3)시켰다. 홍콩 특별지위가 박탈되면 달러당 7.75~7.85홍콩달러로 환율을 고정하는 페그(peg)제가 위협받아 금융시장이 불안해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홍콩 자리 노리는 싱가포르·도쿄

법률·영어·세제 등 홍콩의 장점을 두루 갖춘 싱가포르는 홍콩의 강력한 대안으로 부상 중이다. 싱가포르의 법인세는 17%로 홍콩(최고 16.5%)과 비슷한 수준이다. 홍콩에 진출해 있는 국내 금융사 임원은 "최근 서울 본사로부터 싱가포르에 영업허가와 사무소 개소 절차를 알아보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중앙은행인 싱가포르통화청에 따르면, 지난 3월 기준 외화예치금은 209억싱가포르달러(약 18조2000억원)로, 전년 2월(72억싱가포르달러) 대비 3배 가까이 늘었다.

도쿄도 적극적이다. 작년 말 일본 정부 관계자들은 대거 홍콩을 방문해 투자사들에 세금 감면 등 각종 혜택을 강조하고 돌아갔다. 도쿄는 뉴욕에 이어 세계 2위 증시 규모를 가지고 있고, 세계 3대 경제 대국 일본의 수도라는 지위를 내세운다. 상하이는 세계 최대 시장 중국에 대한 접근성으로만 따지면 경쟁자들을 가볍게 따돌린다. 증시 시가총액 역시 세계에서 뉴욕·도쿄 다음으로 크다.

그러나 이 경쟁 도시들이 홍콩을 제치는 데 여전히 역부족이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중국에 대한 접근성, 영어 사용 인력, 자본시장의 발달 정도 등에서 홍콩이 아직까지 상대적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또 미·중 분쟁이 전면전으로 치닫지 않을 가능성도 여전히 남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곧바로 홍콩의 특별지위를 박탈하지는 않았고 "절차를 시작한다"고만 밝혔다. 중국과 맺은 1단계 무역 합의 파기나 연계 가능성도 밝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