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리 주말뉴스부 차장

"아빠, 나 결혼했을 때 어땠어?"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서 너를 돌봤기 때문에 하나도 후회가 없었어. 퇴근하고 업어서 재우고 목욕시키고 밥 먹이고…. 아빠로서 할 수 있는 경험을 정말 즐겁고 행복하게 했거든."

자식 기르는 부모라면 안다. 웬만큼 친하지 않고서 부녀지간 이 정도 살가운 대화가 나오기란 어렵다는 것을. 최근 유튜버로 변신한 대기업 총수 딸의 유튜브 채널에 등장한 장면이었다. 회장은 1959년생, 딸은 1992년생. 베이비붐 세대 아빠와 밀레니얼 딸의 대화였다.

X세대인 기자로서는 상상이 안 가는 풍경이었다. 70대인 우리 아버지도 무척 가정적인 편이지만 이런 말을 대놓고 할 만큼 친구 같지는 않다. 유튜버 회장 딸과 또래인 여자 후배가 이 영상을 보고 쿨하게 말했다. "우리 아빠 세대는 자산 규모 상관없이 다 딸 바보구나 싶었어요." 1990년대생 세 자매를 둔 후배 아버지는 몸 쓰는 일을 하시는 블루칼라다. 고된 일을 하면서도 세 딸의 고민을 들어주는 24시간 콜센터를 기꺼이 자처한다고 했다.

가만 보니 평균적으로 '밀레니얼 딸'의 높은 자존감엔 아버지들의 지분이 컸다. '자존감 수업'의 저자 윤홍균 박사는 자존감엔 세 축이 있다고 했다. 자기 효능감(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 자기 조절감(감정이나 행동을 적절히 조절하는 것), 자기 안전감(안전하고 편안하다고 느끼는 것). 자존감을 높이는 데 아빠의 사랑이 절대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매우 중요한 건 맞아 보인다.

사실 딸에 대한 전폭적인 사랑을 표출하는 아버지가 한국에 등장한 지는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2000년대 전후만 해도 할리우드에선 '미트 페어런츠'(2000) 등 사위한테 딸 주기 아까워하는 적대적 장인의 이야기가 흔했지만, 한국에선 광기에 가까운 아들 집착을 보여준 영화 '올가미'(1997)처럼 '아들 바보' 엄마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짙게 드리운 남아 선호 사상이 서서히 걷히고 미디어에 딸 바보란 단어가 등장한 시점은 대략 2000년대 중후반이었다. 이 무렵 밀레니얼 세대는 10대였다. 즉, 밀레니얼 딸들은 아동기·청소년기 아빠의 사랑을 담뿍 받고 자란 첫 세대인 셈이다.

이전만 해도 부모 자식 간 소통 구심은 엄마였지만, 친구 같은 아빠가 등장하면서 집안에 양대 소통 산맥이 생겼다. '밀레니얼 맘'인 한 회사원에게 물어보니 "지금도 고민의 종류에 따라 어떤 고민은 엄마에게, 어떤 고민은 아빠에게 말한다"고 했다.

밀레니얼 세대의 주요 특징도 가만 보면 아빠와의 유대와 관계가 있다. 초보적 단계이지만 육아에 참여하기 시작한 아빠를 보며 자란 딸들은 성평등 이슈에 더 예민할 수밖에 없다. 밀레니얼 페미니스트들의 심리적 지원군엔 딸 바보 아빠들이 있다. 아내는 가부장주의에 묶여 있었지만 딸만큼은 그렇게 살기를 바라지 않는 게 그들 심리다.

상사 눈치를 안 보는 90년대생의 당당함도 연장선에 있다. 후배는 "집안에서 아버지와 친구 같은 관계를 경험했기에 회사에서 남자 어른들과 소통하는 데 두려움이 적은 것 같다"고 했다. 군림하는 제왕적 아버지가 아니라 공감하는 친구, 멘토에 가까운 아빠를 경험한 덕분이다.

재벌 유튜버 부녀의 대화 영상을 보면서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아빠가 딸과 눈 맞추고 대화하면서 말끝마다 "우리 딸을 믿으니까"라고 하는 장면이었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는 "심리적 생명줄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에게 꼭 필요한 산소 공급은 '당신이 옳다'는 확인, 정서적 '내 편' 인증"이라고 했다. 아빠로부터 쉴 새 없이 '내 편 인증'을 받는 밀레니얼 딸들의 심리적 생명줄이 위 세대보다 단단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