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의 수석 보좌관 도미닉 커밍스가 25일(현지 시각) 런던 총리 관저에서 자신의 봉쇄 규정 위반에 대한 기자회견을 한 뒤 자택으로 돌아가고 있다.

지난 23일 이후 나흘째 영국이 보리스 존슨 총리의 수석 보좌관인 도미닉 커밍스(49)의 거취를 놓고 떠들썩하다. 정권 실세로 군림하는 그가 코로나 봉쇄령을 어기고 런던에서 고향 집까지 260마일(약 416㎞)을 차를 몰고 간 사실이 드러난 후부터다. 야권이 집중포화를 가하는 것은 물론이고 여당인 보수당 의원 20여 명이 공개적으로 "사퇴하라"는 압력을 넣고 있다. 하지만 존슨은 커밍스 사퇴 요구를 일축했다. 25일 기자회견을 연 커밍스도 "후회할 행동을 하지 않았고, 사퇴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자 26일 더글러스 로스 영국 스코틀랜드 담당 정무차관이 "커밍스가 옳았다고 말할 수 없다"며 사퇴했다.

커밍스가 누구길래 그를 축출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게 나오고 존슨은 왜 그를 지키려고 애를 쓸까. 옥스퍼드대 역사학과를 졸업한 커밍스는 20년 넘게 정치 전략가와 정치인 참모로 살아오고 있다. 20대 시절부터 EU(유럽연합)에 강한 반감을 표출해 왔다. 1999년 유로화 도입에 반대하는 진영의 전략가로 활동하며 이름을 처음 알렸다.

그가 영국인들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긴 건 2016년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국민투표 때다. 그는 브렉시트 캠페인의 총괄 전략가였다. 당시 그는 '통제권을 되찾자(Take Back Control)'는 간결한 슬로건을 만들었다. 또 "영국이 EU에 내는 분담금을 이제는 국민건강서비스(NHS)에 쓰자"는 논리를 퍼뜨렸다. 당시 런던 시장에서 물러나 있던 존슨은 이 문구를 빨간색 버스 옆면에 붙이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국민투표는 브렉시트 찬성파의 승리로 끝났고, 커밍스는 '사악한 천재'로 불리기 시작했다. 패배한 데이비드 캐머런 당시 총리는 커밍스를 가리켜 "직업적인 사이코패스(정신질환자)"라고 했다.

지난해 7월 보수당 경선과 12월 총선에서도 커밍스는 '브렉시트를 완수하자(Get Brexit Done)'는 간결한 메시지를 내세워 존슨의 압승을 이끌었다. 존슨이 그를 쳐내지 못하는 이유다. 일간 가디언은 "복잡한 사안을 핵심적인 문구로 정리하는 능력이 탁월한 커밍스를 존슨은 절대적으로 신임한다"고 했다. 둘 다 옥스퍼드대 출신이지만 '엘리트 그룹 내의 아웃사이더'라는 정서적 공통점이 있다.

커밍스는 급진적 개혁을 지향한다. 모든 돈과 권력을 런던이 쥔 불균형을 깨부수고 지방 분권을 이뤄내야 한다는 신념이 있다. 전통적인 인문·사회계 엘리트를 쳐내고 수학자와 데이터 과학자가 국가를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도 일관되게 펼친다. 기성 정치인과 공무원 사회에 대해 노골적인 불신도 표시한다. 그러면서 그에 대한 불만도 쌓여갔다.

커밍스에 대한 비판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전망이다. 커밍스는 EU 잔류를 선호하는 절반 가까운 영국민들에게 공적(公敵)이다. 비타협적이고 독설을 서슴지 않아 브렉시트 찬성파에도 적이 많다. 여당 일각에서도 커밍스가 권력을 독점하며 영국식 의회 정치 전통을 무너뜨린다고 우려한다. 특히 올해 초 사지드 자비드 재무장관이 커밍스와 갈등을 빚다 사퇴한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내각 2인자가 총리 보좌관에게 힘에서 눌리자 의회의 자존심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커밍스는 보수당 당적을 가진 적이 없다.

커밍스는 옥스퍼드대 졸업 직후 3년간 러시아에서 사업하며 머물다 온 적이 있다.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같은 러시아 작가에게 심취했다. 커밍스가 EU를 싫어하는 이유가 뿌리 깊은 친러 성향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심지어는 러시아가 보낸 스파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