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옥 소설가

10년 만에 방영 시간을 기다려 보는 드라마가 생겼다. 16회를 몰아 보는 습관을 버리게 된 까닭을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이 드라마에 ‘악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도드라진 특징이 있다는 점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내게 ‘슬기로운 의사 생활’은 100퍼센트 판타지 드라마다. 팽팽한 갈등과 긴장감이 드라마 보는 재미인 건 맞는다. 보통의 메디컬 드라마라면, 권력욕에 눈이 먼 병원장, 의사와 간호사를 괴롭히는 밉상 환자, 끝없는 사내 정치와 성공에 대한 야망으로 끝내 파멸하는 인간 군상이 등장할 것이다.

물론 이 드라마가 그리는 세계에 갈등이 없는 건 아니다. 생과 사를 가르는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더 그렇다. 다만 그 갈등이 아프고 약한 인간이기에 별수 없는,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해하려는 것이 아니어서 마음이 놓인다. 자신의 아픈 아이가 죽을까 두려워 목이 터지게 항의하지만, 끝내 아이가 세상을 떠났을 땐 누구보다 괴로워하던 의사를 도리어 위로하는 보호자가 있는 세상. 내가 자주 잊고 사는 그런 세상의 반대편에, 자신이 진료하던 조현병 환자의 흉기에 사망했지만 조의금을 정신 질환자들을 위해 기부한 가족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라 먹먹했다.

싱글 대디로 아이를 챙기며 밤낮없는 수술로 피곤에 찌든 친구를 바라보며 다른 친구가 조용히 묻던 말이 가슴에 남았다. "익준아. 너는 널 위해 요즘 뭘 해주니?"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병원에서 분투 중인 내 친구와, 마스크 흉터 뒤에 있던 의료진의 뒷모습이 떠올라 더 그랬다.

직접 농사지은 딸기 박스 안에 환자가 넣어둔 젖은 편지 속 말. 저를 포기하지 않아주어서 고맙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이 ‘고맙다’와 ‘미안하다’인데, 나는 이제 미안할 일이 많은 사람에겐 고마운 일도 많다는 걸 알 만한 나이가 되었다. 너무 미안해서 고마운 이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세상이 요즘의 내겐 이 ‘악인 없는 세상’이다. 슬기로운 의사들이 모여 사는 이 드라마 속 공간에 기대어 자주 쉬는 나를 보면서.